여행스케치

소수서원(紹修書院)과 선비촌

아 짐 2008. 2. 26. 23:22

2008. 02. 24

 

영주 부석사를 둘러 보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서울 가는 차량인데 풍기를 지나가니까 우리의 목적지인 소수서원을 함께 동행하여 데려다주겠다는 친절하신 아저씨를 만나 버스를 기다리는 수고를 덜고 점심식사를 마치자 곧 소수서원으로 향할수 있었다.

이곳은 완전 관광유락단지화 되어 예전의 고요한 맛이 많이 없어졌다. 모듯것이 다 변하는데 이곳이라고 정체되어 있겠는가..

 

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선비촌

선비촌은 우리 민족의 생활철학이 담긴 선비정신을 거양하고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재조명하여 윤리도덕의 붕괴와 인간성 상실의 사회적 괴리현상을 해소해 보고자 충효의 현장에 재현하게 된 것이다다. 앞으로 소수서원과 연계되는 영주 선비정신의 계승과 이를 통한 올바른 가치관 정립 그리고 역사관 확립을 휘한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오감체험형 전시와 참여형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의 기회가 수시로 제공되는 선비촌의 각종 기획프로 그램에서 옛 선비들의 당시 행활상을 통해 잊혀 가는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안내문에서-

 

 

 

 

 

 

 

 

 

선비촌의 저자거리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 선생이 고려말의 유헌인 안향선생의 연고지에다 중종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해에는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한데서 비롯되었다.

명종5년(1550) 퇴계 이황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건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이 되었다.

이곳에 주향된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은 도첨의 중찬 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이시며 동방 신

유교의 비조(鼻祖)이시다.

경내에는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과 보물 5점, 도유형문화재 3점을 비롯한 유물. 전적(典籍)등이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93년도에 건립된 충효교육관에는 160석의 좌석에 시청각 기기 등을 갖춘 교육시설과 서원의 역사와 기능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료관이 있어 유교문화의 도장으로 그 기능을 다하고 있다.

 

주세붕 영정 보물 제717호 왼쪽 주세붕선생, 오른쪽 이덕형선생

이 그림은 조선 중기에 그려진 주세붕(1495~1554)의 영정으로 크기는134x62.5cm이다. 그는 문신으로 자(字)는 경유(景誘), 호는 신재

(愼齋), 시호는 문민공(文敏公)이다. 중종 17년(1522)에 문과에 급제하고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해 간 이듬해 백운동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의 사당인 회헌사(晦軒詞)를 세우고 이어 1543년 주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을 창설했다.

그후 직제학, 도승지,호조판서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된 다음 예조판서에 추증(追贈) 되었으며 인조 11년(1633)에는

소수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안향 영정과 이제현 영정등 고려시대의 초상이 우안팔분면(右顔八分面)을 취한 자세를 보이는데 비해 이 주세붕 영정은 왼쪽 얼굴이

70%정도 보이고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을 취하고 있으나 상반신만을 그린 반신상이라는 점과 화면 상단에 공간을 남기고 있는

화면구도 등으로 볼때 안향 영정의 전통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안향선생 영정 국보 제 111호

이 그림은 조선 명종 4년(1559)에 그려진 회헌 안향(安珦, 1243~13060의 영정으로 규격은 88.4X53.7cm이다.

안향응 고려 중기 문신으로서 고려 충렬왕12년(1286) 원나라에 갔을때 주자서와 주자초상을 가지고와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옷의 윤곽과 주름은 유연한 선으로 간결히 요약하고 음영을 표시하지 않았으며 안면은 붉은 선으로 윤곽을 잡고 역시 가는 선으로

오관(五官)을 나타내고 있어 예스러움을 보여주며 전체적으로 학자의 차분한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일영대(日影臺)

이 석조물은 상. 하부의 석재로 이루어진 해시계이다. 맑은날 상부석재 위에 꽂은 막대기 그림자가 하부석재 위의 12간지에 드리워지므로 시간을 재던 곳이다. 

 

전사청은 봉향집기(제사용그릇) 등을 보관해 두던 곳이며 춘. 추 제향 때마다 집사들이 제물을 마련하던 곳이다.

 

장서각은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으로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하신 '어제 내사본'을 비롯 많은 장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서책은 좌우지선

(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으뜸 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숙소 우측에 세워져 있다.

장서각 앞의 돌기둥은 관세대로 사당 참배시 대야를 올려 놓고 손을 씻기 위해 만든 석조물이다.

 

문성공묘 보물 제1402호

이 건물은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선생이 고려의 유현인 회헌 안향(1243~1306)을 기리고자 그의 연고지에 세운

사당이다. 중종 39년에는 안축선생과 안보선생을 배향하였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 선생을 추향하였다. 매년 춘, 추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소수서원 강학당 보물 제 1403호

강학당 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던 곳이다. 사방으로 툇마루를 둘러놓고 배흘림 기둥 양식이 특이한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 이란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으며, 규모는 정면4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로서 웅장하면서도 고색이 잘 간직되어 있으며, 사방 둘레에 너비 1m정도의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툇마루 가장자리는 높이 6.5㎝, 높이 8.5㎝의 턱을 두었고, 기단 네 모서리에 추녀를 받는 활주를 설치하였다.
강학당의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정면 4칸 중 좌측 3칸은 마루이며, 우측 1칸에는 방을 2개 설치하였고,기단3면(정면, 우측, 좌측)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굴뚝은 마루 밑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 처리하였다.
기둥 윗몸에서 앙서 하나를 내어 기둥위에 놓인 주두와 결구시킨 초익공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는 오량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를 받치고,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경렴정

신재 주세붕 창건.  서원담밖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며 시연을 베풀고 호연지기를 가꾸던곳이다. 옆의 커다란 은행나무는 보호수이다.

 

취한대(翠寒臺)

죽계천은 얼어있고 이황선생이 죽계계곡의 풍치에 심취해 이름을 붙였다는 백운동 취한대는 노니는 사람없이 쓸쓸하다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의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에서 따왔다. 취한대 옆에는 물가에 바위에 백운동경이라 씌어진 바위가 있다(白雲洞 )

 

백운동 경()자 바위: 바위에 새겨져 있는 백운동은 퇴계 이황선생 글씨로 전해 오고 붉은 색의 경자는 신재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써서

새긴 것으로 신재집에 전해오며 유교의 근본사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의 머릿글자이다.

세조 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순흥으로 들이닥친 관군은 병졸들만 죽인게 아니라 사방 10리 이내의 세살 이상의 양반남자는 모두 '청다리'에서 참형에 처했다. 일반 평민은 병졸과 가담 했던 사람들이니 순흥 고을 세살 이하만 살아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는지 모를 정도다.

그 때 희생 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이 이 곳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를 듣게되어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경()자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더니 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온다.

 

탁영대와 탁청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謙菴) 류운용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 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이다.

 

소수서원에서 선비촌 가는길

 

관람시간: 09;00~18:00(하절기 09:00~19:00, 동절기 09:00~17:00)

매표시간: 09:00~관람시간 1시간전 (연중무휴)

관람요금: 어른3,000(소수서원, 선비촌, 소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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