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관
봄바람이 따뜻한 토요일 오후 퇴근후 어딜가볼까 궁리끝에 며칠전 안견의 사시팔경도란 그림을 보고싶어서 검색해보니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괜한 궁금증이 일어 별안간 국립극장으로 달려가는 나도 참 우습다..
대림에서 신도림으로.. 신도림에서 용산으로.. 다시 이촌행 전철을 타고 2번 출구로 나가면 쉽게 박물관에 갈 수 있다.
몇해전 겨울에 잠시 다녀왔는데 오늘도 역시 시간이 별로 없어 얼마나 보고 올수 있을지..
이촌역 2번출구로 나오면 박물관과 용산가족공원을 갈 수 있다.
박물관 도로 옆에 벌써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봄의 전령 노릇을 톡톡히 한다. 화사한 봄빛이 마음을 살며시 흔들어 놓는다.
한적한 박물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 온다.
일단은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 경관을 둘러 보려 한다. 정문 우측 어울마당에서 관람을 시작 했다. 가족이 함께 걸으며 뛰어놀수 있는
박물관 열린공간이 참 좋다.
어울마당을 돌아 석조물 정원으로 향한다. 이곳 석조물정원에는 다수의 국보와 보물이 함께 전시되어있다
갈항사3층석탑 국보 제99호 경북 김천 갈항서터
통일신라시대에는 이 탑처럼 2단의 기단부와 3층의 탑신부로 이루어진 탑이 일반적인 형태로 많이 만들어졌다. 이 탑이있던 갈항사는
통일신라초기인 감은사처럼 하나의 금방에 두 탑이 있는 배치였을것으로 짐작된다. 동탑의 기단부에 새겨진 글을 통해 신라 경덕왕 17년에
영묘사 언적법사 세 남매가 이 탑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남계원7층석탑 국보 제100호 경기 개성 남계원터
이탑은 세부 묘사에서는 통일신라 석탑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탑신이 7층이고 지붕이 얇고 넓으며 위로 올라갈수록 탑신의 두께가
둔중한 느낌을 주는 고려 탑 특유의 특징도 보인다. 특히 이 탑에서는 고려 충렬왕9년에 넣은 것으로 여겨지는 쪽물을 들인 중이에 은물로
글씨를 쓴 경전 일곱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천수사 3층석탑 강원 원주 천수사터
탑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기단부는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는 2층 기단 형식이다. 탑신부 몸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과 2층
탑신 아래에는 굄돌이 놓여져있다. 지붕 처마 층단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지붕의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다. 탑의 꼭대기에 해당하는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다.
천수사 5층석탑 강원 원주 천수사터 고려
하층기단 덮개돌 아래 부재는 없어졌다. 각각의 탑신부 몸돌은 한 개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다.
지붕 처마에는 각 층마다 3단의 받침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풍경의 일종인 풍탁을 단 작은 구멍이 네 개씩 남아 있다. 탑 꼭대기 장식인
상륜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홍제동 5층석탑 보물 165호 서울 홍제동 사현사터
이 석탑은 서울 홍제동 사현사터에 있던 탑으로 고려 정종11년 사현사 창건 당시에 세워진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새김법과 새롭게 유행한 탑신받침의 덧붙임, 그리고 벽 테두리 장식 등에서 고려 전기 석탑의 조형미가 드러난다.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
안흥사 5층석탑 경기 이천 안흫사터 통일신라말~ 고려초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 일반적인 형태이다. 탑신 높이는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며 처마 밑 층단받침은 네 단인
5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섯 단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에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만 남아 있다. 탑의 세부 수법이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띠며 균형 잡힌 비례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석탑으로 보인다.
탑이 숲을 이룬곳을 지나 미르폭포로 향한다. 탑을 꼼꼼하게 둘러보지 못하고 산책로 주변으로만 눈길을 주고 앞으로 나아가니 마음이 찜찜
하다. 뭐하나라도 제대로 보고 가야하는데 4시 퇴근해서 이곳에 도착하니 마음만 빠쁘다. 그래도 다행히 토요일은 박물관이 오후 19시까지
관람을 할수있다하여 야외를 먼저 둘러보는데 한정된 시간에 괜시리 종종 거린다.
미르는 龍을 뜻하는 옛말로 박물관이 위치한 용산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미르폭포, 미르못, 미르다리가 있는 박몰관 정원은 우리의 전통조경을 엿볼 수 있도록 꾸민 공간이다.
이곳은 불상공원이다. 石造佛立像 고려10~11세기
정원에 드문드문 매화가 피어있다. 올들어 처음으로 마주한 활짝핀 매화의 모습이 웃음짓는 봄처녀의 화사한 얼굴 같다.
보신각종 보물제2호
조선 세조14년(1468) 원각사(현재 탑골공원)에 걸기 위해 만든 종이다. 절이 없어진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가 광해군11년 보신각으로
옮겨져 파루(오전 4시)에 33번, 인정(오후 10시)에 28번 울려 도성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쓰였다. 하나의 몸체에 양 쪽으로
용머리가 달린 장식고리가 달려 있으며 몸통 한가운데는 세 겹의 굵은 띠가 둘러져 있는데 이러한 모양의 종은 고려 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만들어진다.
야외를 대충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박물관 관람에 나섰다. 하얀 석조건물이 무척 깔끔하다.
거울못을 내려다볼수 있는 멋진 테라스.. 누군가와 동행했다면 잠시 앉아 담소라도 나누고 싶은 곳이다. 나는 혼자 왔고.. 시간도 없고..
누군가와 함께 가려하면 미리 약속해야하고 만나야 하고 함께 행동해야 하고 난 이것이 무척이 나 귀찮다. 영화관람도 마찬가지이고..
난 너무 혼자서 노는데 익숙한건 아닌지.. 어제만해도 친구가 영화를 보자는데 친구는 코믹물을 보자하고 난 코믹물은 싫다하고 결국 약속이
결렬되었다. 덕분에 이런 귀한 시간을 얻었지만..
박물관 옆에서 무슨 촬영이 있는지 카메라맨이 몇이야? 나도 뭔일인가 들여다봐도 가시내가 총들고 뭐하는건지.. ㅎ
거울못이란 이름에 걸맞는 잔잔하고 깔끔한 연못이다. 저녁 야경도 환상이구..
2005년 10월 28일에 준공하여 그해 12월 31일 까지 무료입장을 했다. 나도 그때 한걸음에 달여왔었지만.. 그리고 이번에 어찌하다보니 또
무료관람 시기에 오게 되었다. 모르고 왔는데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으로 무료입장 기간이라네 ㅋ
한국 발물관 100년 발자취
1909년 11월 1일 현재의 창경궁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창경궁 안에는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박물관이 설립되었고 이것은 이후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설립된 박물관을 당시 신문에서는 '제실박물관'이라고 불렀는데 별도의 박물관 건물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명정전,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 등의 창경궁 전각을 수리하여 전시실로 사용하였다. 원래 생활공간으로 만들어졌던 창경궁의 전각들은 내부에 조그만 방들이 많았고 방마다 온돌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하기 위해 방들을
하나로 터서 마루로 만들고 온돌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하기 위해 변경되었던 창경궁 전각들의 내부 구조도 원상으로 복구되었다. 경춘전, 양화당 등도 이에 따라 원래의 구조로 복구되었다. 하지만 환경전은 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되었던 구조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의 흥미를 끈다. 창경궁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겠지만 한국 최초의 근대 박물관의 흔적을 살리는 노력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오영선 (100주년 기념사업추진팀)-
입장료 대신 매표소에서 무료 입장권을 발부 받아 입장하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채의 실물 자료이다. 부채는 고구려 무덤벽화 등에서 볼 때 소유자의 지위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추정된다.
오리모양 토기
고달사 쌍사자 석등 보물 제28호 고려시대
두 마리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석등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러한 형태의 석등이 등장하지만 이 고달사 쌍사자
석등은 다른 쌍사자 석등과 달리 웅크린 사자가 불발기집을 받치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석등은 고달사가 우리나라 3대 선원의 하나인 고달원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려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복궁옆 잔디밭에 있다 지금의 자리로..
경천사 십층석탑(敬天寺 十層石塔)은 고려 충목왕4년(1348) 시기의 강유이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는 겅천사에 세운 석탑이다.
국보 제 86호이며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회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1909년 무렵에 일본을 불법 반출되었다가 반환되어 1960년에 서울 경복궁 안에 재건하였다가 현재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3단으로 된 기단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1348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현재 국보 2호인 원각사지 시비층석탑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위에서 먼저 관람하고 내려올 요량으로 3층으로 먼저 올라갔다. 3층은 중국, 중앙아시아, 일본 등 기증품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제일 커다란 자리를 차지한 이홍근 선생의 기증 문화재를 둘러 보았다.
백자 차주전자와 향 꽂이
접시형 받침에 산 모양의 향곶이를 붙인 백자이다. 용이 산을 둘러싸고 있으며 산 꼭대기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향을 곶을 수 있게 하였다.
푸른 빛이 감도는 유약이 겨울 산의 차가운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걸작이다.
백자 장생무늬 병 조선 19세기
이 병은 목이 길고 하부는 넓게 퍼져 있다. 안정감이 느껴지는 이러한 병은 19세기에 등장하는 형태이다. 몸체 전면에는 소식화된 산을
배경으로 구름, 사슴, 학, 거북, 대나무, 풀 등 오래 사는 것과 관련된 여러 동. 식물들이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다.
물고기 무늬 장군 조선 15세기
그리스 고대 청동 투구 기원전 6세기 보물 제 904호 손기정 기증 문화재
손기정 선생은 육상선수로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여 당시 최고 기록으로 우승하였다. 선생의 우승은 일제 압제하에 있던 우리 민족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일대 쾌거였다.
선생이 기증한 청동 투구는 마라톤 우승자에게 주는 부상품이었으나 그 당시에 전달되지 못한채 베를린박물관에 보관되어 오다가 지난 1986년 뒤늦게 수여된 것이다. 선생은 이 투구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라 생각하여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투구를 기증하였다.
금동관 삼국시대 (신라) 변종하 기증문화재
모란 국화넝쿨무늬 조롱박 모양 주전자
김종학 기증 목공예품
김종학 선생의 기증 몬화재 중 종교용품은 불교와 무속신앙에 관련한 것이다. 불교 목공예품으로는 동자상, 사자모양 받침대 그리고 황실의
복과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전패등이 있는데 화려하고 정교하기보다는 대부분 친근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는 조선시대 불교가 토착화하면서 서민들의 소박한 꿈과 해학적 재치가 반영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불교 목공예품이 만들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러가지 모양의 작은 나무 인형들은 무신당이나 상여에 놓는것으로 원혼을 달래고 영혼을 좋은 세상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공예품들은 조선의 사회가 비록 유교를 근본으로 하였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민간에서는 불교나 민속신앙의 영향력도 컸음을 알려 준다.
사자상 조선 19세기
등잔걸이와 서안
신장과 나무인형
불교에서 신장은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이며 무속에서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신격화된 존재이다. 이 신장상과 나무인형은 죽은 이의 영혼을
저세상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상여에 꽂았던 상이다.
전패(殿牌) 조선후기
축원문을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라 적은 이 전패는 제작기법이나 설채(設彩) 등에서 볼 때 앞에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라 적힌 국왕의 전패와 함께 제작되어 같은 수미단에 봉안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크기가 국왕의 전패보다 약간 작은 것은 그 지위
고하를 나타낸 것이다. 이 크기는 왕비(王妃)의 전패와도 동일한 규모였다고 본다. 이 전패는 후에 경종(景宗:재위1720~1724년)으로 즉위하는 세자를 위하여 만든 것이라고 본다. 축원판 주위에는 국왕의 것과는 달리 모란(牡丹)문양이 주문양이다. 용은 대좌와 상단에만 표현되어 있고 또 모두 측면을 나타냈다. 이는 국왕보다 세자의 신분이 낮으므로 국왕과 차별화한 것이다. 또 수미단의 중앙 국왕의 전패를 향하게 한 표현이다.
나한
나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 부처 입멸후에도 이 세상에 남아 신통력으로 스스로의 수명을 연장하며 불법 수호와 중생 제도를 위임받은자이다. 사찰에서는 나한전이나 응진전등에 모셔져 신앙되고 있다.
이 나한상들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수행하는 젊은 승려 모습인데 한 나한은 엄지와 검지를 맞댄 설법 자세를 취하고 있고 또다른 나한은
사나운 짐승도 항복시키는 신통력을 보여주려는듯 호랑이를 무릎위에 안고 있다.
김희진 기증 문화재
김희진 선생은 1976년 중요무형문화재로 22호 매듭장으로 지정 되었다.
봉황무늬를 수놓은 약주머니와 장생무늬를 수놓은 안경집
이 거북이 모양의 인장의 아래면에는 소유영빈지인(紹裕瑛嬪之印)이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다. 영빈은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선희궁이씨를
가르키며 소유는 고종이 1899년에 영빈에게 내린 시호이다.
박물관 내부의 모습 3층까지 있으며 채광이 아주 좋다.
기증관을 나와 일본 미술관에 들어 왔다. 전통 기모노 차림의 여인내가 시선을 끌고 있다.
박산향로 (博山香爐)
산 모양을 한 두(豆) 형태의 청동 향로다. 산봉우리 사이의 구멍을 통해 향 연기가 마치 상서로운 기운이 봉우리를 감싸 오르듯이 퍼져 올라 신비감을 준다. 박산향로는 중국의 전통적인 도교적 이상향의 세계와 불교적인 우주관이 반영된 것으로 고대 중국인들은 향을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여겼다. 발산향로는 서한(기원전 206년~기원후8년)시대부터 출현하여 육조를 거쳐 당나라 때까지 많이 사용하였다.
송대 이후에는 산모양 혹은 아치모양의 뚜껑에 구멍이 뚫린 자기 향로가 등장하였는데 이는 박산향로의 변형된 형태라 할수 있다.
기원대회도권(祈園大會圖券) 원1271~1369
이 그림 속의 향합, 향로, 향병 세트는 회화에 등장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삼위일체의 형상이다.
현실과 이상의 표현 : 한대의 회화
한대는 장례를 후하게 지내는 관습에 따라 상장예술이 발달하였는데 회화로는 묘실벽화, 사원벽화, 분묘 출토 백화와 화상석 등이 등장했으며 일상생활의 모습 외에 당시 사람들의 사상, 신앙과 종교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화상석은 묘실, 사당 등과 같은 건축물에 사용된 석재의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깍아 내어 그림을 새긴것을 말하는데 조각과 회화의 두가지
특징을 겸비했으며 예술적으로 뛰어나 중국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산동성을 중심으로 발견된 화상석은 출현 시기가 이르고 내용이 풍부하여 화성석의 예술적 수준이 가장 높은곳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신화전설, 귀신신앙, 선인세계와 인간 현실세계등을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현실세계를 표현한 내용을 보면 유교의 '인'을 핵심으로 충, 효, 절, 의를 중요내용으로하는 역사고사화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역사고사 인물을 통해 권계적 의미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말과 단발머리의 서역사람
말 : 당초기부터 국가에서는 공납, 매매, 전쟁으로 몽고, 시베리아, 거란, 서아시아의 말 70여종을 수집하였다. 그 중에 서역에서 수입된
아라비아말은 작은 머리에 눈이 크고 다리가 가늘고 길어 의장용으로 사용되었다. 대부분 삼채도용으로 그 특징을 형상화 했다.
단발머리의 서역사람 : 당대는 서역사람을 마부나 하인으로 묘사하여 무덤에 매장하였다. 천으로 짧은 머리를 묶고 넓은 깃의 허리까지 오는 겉옷과 통 좁은 바지, 뾰족한 신발은 서역에 있었던 전형적인 쿠차사람의 모습이다. 키질벽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낙타와 고깔모자를 쓴 서역사람
낙타 : 당대 초기부터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이 성행하면서 서역지방의 낙타가 대량 수입된다. 이러한 낙타를 도용으로 만들어 호인용과 함께 무덤에 묻었다. 대부분 쌍봉낙타이고 단봉낙타는 아프리가북부, 인도 등에서 수입된 것으로 소량만 출토된다.
고깔모자를 쓴 서역사람 : 새인(塞人)은 전국시대부터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유목민족이다. 고깔모자는 원래 지위가 비교적 높은 자가 쓰는 것으로 후에는 시베리아지역이나 흉노족도 즐겨 쓴다. 한족과 다르게 높은 코와 큰 눈의 이목구비를 가졌다.
마부, 하인으로 묘사되어 무덤의 부장용으로 매장되었다.
뿔달린말 중국 남북조시대 (420~589)
국립중앙박물관 낙랑유적출토품실에서 개최하는 테마전 '영혼과의 동행-중국도용'에 선보이는 뿔달린말이다.
초록 유약이 입혀진 도기
도기로 표현한 정자는 원형의 못 가운데 위치하며 받침 그릇의 테두리 위에 인물, 말, 거위등의 토우가 있다. 정자는 높게 이층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에는 계단을 만들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였고 위층 난간의 네 모서리에는 활을 당기는 무사가, 정자 아래쪽 중앙에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춤을 추는 무녀가, 주위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인물이 배치되어 있다. 도기로 표현한 물 위의 화려한 정자는 동한 말년 귀족들의 생활을 반영한 하느이 축소판이다.
춤추고 있는 채색도용 서한
긴 소매를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자태이다. 무녀의 머리 모양은 뒤로 감아 늘어뜨린 모양이며 안에는 긴 소매의 흰옷, 겉에는 땅에 끌리는 붉은 색의 치마, 오른팔을 위로 올리고 왼팔을 아래로 향하며 춤을 추는 자태다.
동물모양 귀가 달린 청동그릇 춘추시대
인간을 닮은 신들(Sensuous Images)
인도의 종교 미술에서 인간의 형상은 매우 종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많은 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들은 종종 감각적이고
에로틱한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현재 우리의 기준에서 '세속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이러한 표현이 종교적 맥락에 등장하는 현상은
인도의 미술뿐만 아니라 신화, 문화, 음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문화를 향유한 이들은 신체의 감각적인 아름다움이 형제가 없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여겼고 신의 몸이 지닌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것은 신성에 접근하는 전통적인 방식중 하나였다.
성스러운 커풀이 즐겁게 사랑을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찬양하고 그러한 신상을 보면서 자신들도 이러한 축복을 받기를 희망했다.
보살 간다라 2~3세기
수준 높은 조형성과 종교성를 겸비한 보살상으로 간다라 조각 중에서도 사실적인 묘사와 품위있는 모습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균형 잡힌 이목구비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아름다우면서 편안한 인상을 주며 당당하면서도 우아한 풍채는 얇은 옷자락에 감싸여 더욱
돋보인다. 이 지역의 전통적인 미륵보살상과는 달리 머리카락을 끈으로 묶고 있지 않아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을 표현한것으로 여겨진다.
시바, 파르바티, 그리고 스칸다 11세기 인도남부 촐라시대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Tamilnadu) 지역에서 유행한 ‘소마스칸다(Somaskanda)’ 도상으로, 시바(Shiva)와 배우자 파르바티(Parvati), 아들 스칸다(Skanda)로 이루어져 있다. 스칸다 상像은 현재 사라졌으며 시바와 파르바티 사이에는 그 상이 원래 서 있던 작은 방석만이 남아 있다. 시바는 긴 직사각형의 대좌에 유희좌遊戱坐를 취하고 앉아 있다. 그의 4개의 손은 각각 전투에 사용하는 도끼와 사슴을 들거나 확신과
자비를 상징하는 수인을 취하고 있다. 파르바티는 시바와 대칭의 자세로 앉아 있으며 오른손에 수련을 들고 있다. 날렵하고 유연한 신체, 섬세한 장신구와 복식 표현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촐라(Chola) 시대 청동상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보여준다.
누운자세의 여신 마디야 스라데시 1173년
낮은 침대에 누워 있는 여신을 표현한 조각으로 침대 가운데 부분에 내려온 담요 위에 연대를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 있다. 여신은 긴 군의를 입고 여러줄의 목걸이와 구슬이 달린 꽃줄을 걸치고 있다. 한 시종은 머리를 만져주고 있으며 또 다른 시종은 붉은 색의 알라타카라는 안료로 발바닥을 칠하고 있다. 침대 옆에는 등잔, 그릇, 신발 등이 놓여 있다. 이 여인이 걸치고 있는 장신구는 결혼한 여인의 치장 방식과 유사하여 힌두신의 배우자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미투나, 사랑을 나누는 남녀 라자스탄 또는 우타르 프라데시 11~~2세기
한 쌍의 남녀가 에로틱한 자세로 표현된 ‘미투나(mithuna)’ 상은 인도 미술에서 인기 있는 모티프 중 하나로 풍요와 길상의 의미를 지닌다.
원래 사원의 벽을 장식했던 이 조각에서 남성은 여성의 허리끈을 풀고 있고 여성은 남성의 머리카락을 잡아 끌어당기고 있다. 남녀 모두 도티(dhoti, 군의)를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과 긴 눈매가 인상적이다.
문설주 부조 라자스탄 또는 우타르 프라데시 9~10세기
9~10세기 라자스탄과 우타르 프라데시 지역에서는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된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이 많이 지어졌다. 여기 전시된 조각은 사원입구 부분의 문설주에 해당하며 당시 유행한 여러 가지 모티프가 조각되어 있다.
깊이 조각된 5개의 작은 감실에는 각기 다른 남녀 한쌍이 등장하며 그 사이에는 마카라가, 왼쪽에는 나기니(신격화된 코브라의 여성형)가
덩굴줄기와 얽힌 모습으로 표현 되어 있다.
시바와 바르바티
창조신 복희와 여와 아스타나 7세기
중국 천지창조 신화의 남신인 복희와 여신인 여와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두 신은 상반신은 사람 형상을하고 있지만 하반신은 뱀과 같은 모습으로 서로 꼬여있다. 각 신은 컴퍼스와 구부러진 자를 들고 있는데 이는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우주관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바탕천은 원래 파란색이었으나 가장자리를 제외하고 대부분 초록색으로 바래있다. 신상은 강한 목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붉은색과 흰색 안료를 칠해 완성했다. 배경에는 해와 달, 별자리를 그려 넣어 하나의 소우주를 재현하고 있다. 색채가 선명하고 구도가 균형잡혀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또한 얼굴과 손에는 음영 표현, 해와 달의 형상화 등에서 중앙아시아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종교 조각
중앙아시아의 사원에서는 다양한 조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각은 그림보다 실재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예배의 대상인 신상은 조각으로 만들어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종교 건물의 내외벽면에도 수호신과 장식 문양을 부조로 만들어
장식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종교 조각은 나무나 청동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이보다는 구하기 쉽고 제작도 용이한 흙으로 만든 소조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많은 수의 조각을 빨리 만들기 위해 틀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대부분 표면에 색칠을 하여 완성하였다. 양식은 헬레니즘, 서아시아, 인도, 중국
조각의 영향이 한데 섞여 있다. 그러나 얼굴 중앙에 이목구비가 모여 있는 모습이나 소박함이 느껴지는 장신구와 표현기법에서는 중앙아시아
조각만의 특징이 드러난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 6~7세기
이 조각은 불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신이 표현된 것이라 생각되며 현재는 상반신만 남아있다. 가슴에 보이는 나선형의 무늬는 갑옷을 장식했던 문양이라고 생각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사원을 장엄하기 위해 이와 같은 소조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소조상을 만들 때는 우선 나뭇가지나 식물의 줄기를 새끼줄로 묶어 심을 만든다. 그 위에 동물의 털이나 식물성 섬유를 섞은 점토를 발라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 고운 흙과
채색을 입혀 완성한다.
청동북
북의 윗면 가장자리에는 네마리 두꺼비가 배치되어 있고 원형의 기하문양이 층층이 둘러져있으며 날고 있는 새가 생동감 있게 장식되어
있다. 중앙에는 도드라진 태양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복부에는 기하 문양과 나는 새가 장식되어 잇다. 한 쌍의 고리가 중간 부위 양쪽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끈으로 묶어 매달아 놓고 북을 쳤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삶과 문화
등잔 용화첩화용문등잔(靑花貼花龍文燈盞) 막왕조 도안타이4년(1588)
이 등잔은 몸체가 상하로 나누어진다. 윗부분은 연꽃 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래 부분은 호리호리한 항아리 모양이다.
목 부분에는 날개가 달린 용, 연꽃 속에 있는 용, 보리수 안에 있는 용, 기하학적 문양등이 새겨져 있다. 몸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등잔은 1588년 당후옌통(鄧玄通)이 제작한 것이다.
새와 사슴 무늬 항아리 용우엔(阮)왕조 19세기
오리모양 주전자와 코끼리 장식이 있는 병 6~7세기
등잔 3~4세기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
사람 모양의 등잔 타인호아 성 출토 2~3세기
공공 회당 모형
악기
악기
베트남관을 마지막으로 구경하고 3층 계단을 내려온다. 시계를 쳐다보니 7시가 넘었다. 배도 고프고 귀가가 늦어질거 같아 아찌한테 박물관에 왔다 늦어진다고 통보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 내가 일의 순서을 상실했다. 내가 오늘 박물관에 온 이유는 안견의 사시팔경도를 보기 위함이었는데 다른 작품에 정신을 잃고 본질을
망각하고 말았다. 다음주 토요일을 또 기약하는 수밖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오고 싶다. 머리속에 기억하는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일이고 사진을 찍어 자료을 남겨오는데 후레쉬사용을 못하기때문에 불빛에 반사되고 작은 안내 글씨는 퍼져 보여 알아볼수가 없는것이 태반이다.
시간이 충분하면 메모를 하겠는데 그렇게까지 열의를 보일 정신자세는 되어있지 않다.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던 계단을 나도 올라 본다. 한쪽에 어둠속에 극장 용이 깜찍하게 불을 밝힌다.
남산타워의 불빛과 도심의 네온들.. 역시 밤은 아름답다.
계단을 내려오며 잘놀고 있는 커플에게 사진 한장 부탁했다. 기념으로 남기려구여 ㅎ 하면서..
야간 촬영은 잼뱅이가 되어서 엄두가 안나지만 그래도 몇컷 눌러 본다.
거울못이 그림자 반사되어 정말 거울 같다.
서늘한 바람과 왠지모를 풍요로움에 행복한 밤이다. 약 3시간을 서성거렸더니 다리도 아프고 힘도 들지만 그래도 나만이 누릴수 있는
작은 행복이란 생각에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고 누리고 싶다. 이젠 편안한 안식처 집으로..
이촌역에서 전철을 타고 삼각지에서 6호선 환승하여 돌곶이 하차.. 바람이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