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청량산870m (경북 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아 짐 2023. 6. 26. 18:50

일 시 : 2023. 06. 23 (금)

참 가 : 아찌랑 나랑

코 스 : 입석- 응진전갈림길- 응진전- 풍혈대- 김생굴-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뒷실고개- 하늘다리- 장인봉- 청량사- 입석

 

 

봉화 산행 2일차 오늘은 청량산 산행을 한다.  청량산을 2009년 다녀가고 이제사 찾으니 너무나 무심했다.

그때는 산악회 따라서 왔는데 청량사를 패스하는 바람에 오늘의 목표는 청량사다.

봉화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삼계쉼터 캠핑장에서 잘 자고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어제 축융봉 들머리인 입석으로 향한다.

 

 

주말이면 등산객이 북적거릴텐데 오늘 금요일이라 주차장이 한가하다.  여유로운 산행지가 될듯 하다.

 

 

입석에서 응진전입구로 오른다.

 

 

굴이 있는데 낙석 위험이 있는지 출입금지다.  입구에 마음 한번 다잡아 먹고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 온다.

 

 

고사목에 누가 이런 조각을 남겼을까?  솜씨 좋은 사람 참 많다 ㅎ

 

 

응진전 갈림길이다.  우측 응진전으로 올랐다 좌측 청량사로 하산 한다.

 

 

안내소에서 올라 오는 도로가 보인다.

 

 

나무에 숫자가 있는데 무슨 의미?

 

 

응진전 아래 화장실 건물

 

 

고수

 

 

털별꽃아재비

 

 

무위당

 

 

응진전 뒤 사립문으로 들어가 보았다.

 

 

쫄쫄 흐르는 약수와 자그마한 불상이 놓여 있다.

 

 

풍혈은 바람이 통하는 굴을 말한다.  이곳은 층암 절벽이 남북으로 통하여 오뉴월 염천에도 항상 서늘한 바람이 분다.

신라 말 대문장가로 알려진 최치원이 이 부근에 머물 때 이곳에서 독서와 바둑을 즐겼던 것으로 전한다.

풍혈대 바로 밑에는 요극일이 글씨 공부를 했다는 극일암 터가 남아 있다.

 

 

지금 염천도 아닌데 바람이 없는데?

 

 

이곳에서 청량사가 아주 잘 보인다.  멋진 조망처다.

 

 

총명수가 나온다는 샘터는 말라 물이 하나도 없다.

 

 

어풍대에서 바라 보는 청량사 전경

 

 

김생굴로..

 

 

아래는 청량사로 가고 윗길은 김생굴로 간다.

 

 

경일봉은 패스하고 자소봉으로 간다.

 

 

김생굴은 경일, 금탑 양 봉우리 사이에 있으며 굴 속의 면적이 넓어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천연 암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김생이 여기에서 10년간 글씨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  붓을 씻었다는 우물의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김생과 봉녀가 글씨와 길쌈 기술을 겨루었다는 전설이 어린 곳이기도 하다.    - 청량산도립공원-

 

 

김생폭포는 김생굴 앞에 있으며 장마철에 여러 계곡의 물이 합류하여 폭포를 이루어 오산당에서 바라보면 천길 높은 곳에 흰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장관이다.  송재 이우(1469~1517)가 쓴 시의 한 구절인 옥홍횡음간중천(玉虹橫飮澗中泉)이라는 표현에서 김생폭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굴도 폭포도 옛날 설이니 그런갑다 하고..

 

 

청량사는 하산시 갈 예정이라 무조건 go~

 

 

자소봉을 향하여..

 

 

만월암지

 

 

송진 채취 흔적이 많다.

 

 

우측으로 올랐다 내려와서 좌측으로 진행한다.

 

 

아찌가 오늘 많이 힘들어 한다.  내가 쉬자고 하기 전에 솔선수범하여 쉬자고 하고 과일도 꺼내 주고 ㅎ

 

 

자소봉 오름 계단 엄청 가파르다.

 

 

불안해서 파이프 잡고 올라야 한다.

 

 

다시 내려 간다.

 

 

기린초

 

 

생긴 모습이 마치 붓끝은 모아 놓은것 같다 하여 탁필봉이라고 한다.

 

 

지나온 자소봉

 

 

연적봉 오름중..  이곳도 올랐다 다시 내려 와서 우틀한다.

 

 

자소봉과 탁필봉

 

 

하늘다리가 보인다.

 

 

뒷실고개다.  입석에 있는 차량회수 때문에 하늘다리에 갔다 다시 이곳 뒷실고개로 돌아와 청량사로 간다.

 

 

요즘 지자체 마다 다리 경쟁이 붙어서 긴 다리는 넘쳐 나고 있지만 높이 만큼은 청량산 하늘다리가 제일 높지 않을까 한다.

2008년에 개통되어 2009년에 청량산에 왔으니 아마도 이 하늘다리를 보겠다고 오지 않았을까 싶은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찾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이곳은 세월이 흘러도 그때 그 모습으로 기다려 주니 고마운 일이다.

변한건 나의 육신과 마음이겠지..

 

 

건너편에는 어제 갔던 축융봉이 보인다.

 

 

장인봉으로..

 

 

청량산의 최고봉 장인봉에 도착 했다.

 

 

춘양 2등삼각점이 있다.

 

 

장인봉 갈림길로 내려와 다시 하늘다리로 통과하여 뒷실고개에서 청량사로 간다.

 

 

뒷실고개 도착.  이제 청량사 하산이다.

 

 

오느쪽으로 가도 아래에서 만난다.

 

 

장인봉, 전소봉 갈림길

 

 

청량사에 도착했다.  천천히 구경모드로..

 

 

청량사에 관심을 갖었던건 워낭소리에 등장했던 오층석탑이 보고 싶어서였는데 석탑 앞에 서있는 커다란 삼각우송에 대한 설화도 재밌다.

의상대사와 원효대사가 청량사 창건을 위해서 골몰하고 있던 어느 날 마을 논길을 걷다가 일하는 농부를 만났다.

농부는 소를 데리고 논을 갈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소가 뿔이 셋이 달린 소였다.  그런데 소는 무슨 영문인지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이때 원효대사가 영감을 얻어 농부에게 이 소를 절에 시주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으니 워낙이 말을 듣지 않는 소였기 때문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여 원효대사는 소를 몰고 절로 돌아 왔다.

그런데 절마당에 들어서자 그렇게 날뛰던 소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이후 소는 청량사 절을 짓는 동안 목재를 나르는 등 밤낮없이 일을 하였는데 준공을 하루 앞두고 생을 마치고 말았다.  이 소는 다름 아닌 지장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원효대사는 그 소를 절마당에 정성껏 묻어 주었는데 그 자리에서 소의 삼각뿔을 닮은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났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이라 부르고 소를 묻은 자리를 삼각우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삼각우송 앞에는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오층석탑과 금탑봉이 있다.

 

 

아기자기한 절마당에 반가사유상이 있네?

 

 

지장전에 보물인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있는데 안쳐다 보고 왔다 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3년(663)에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지은 절이다.

청량산에는 연대사라는 절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26개의 암자가 있어서 당시 신라불교의 요람을 형성했던 곳이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으로 약사전이라고도 한다.  늘 바람이 세찬 산골짜기의 한쪽에 나즈막하게 지어졌는데 법당 앞이 절벽이라 마당이 좁은 편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이 팔작지붕집이다.  건물의 대들보 밑에 사이기둥을 세워 후불벽을 설치한 것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특징으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현판 유리보전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설명을 읽어보니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고.. 이것을 반복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친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건칠불상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유리보전 청소하고 계시는 보살님이 계셔서 사진을 밖에서 살짝 찍다보니 온전한 모습이 나오지 않아 아쉽다.

 

비구니 사찰답게 아기자기하고 깔끔한 청량사 구경을 마치고 설선당 아래로 내려 간다.

 

 

산꾼의집이라는 찻집 내지는 주막인듯 한데 정겹게 단장 하였다.

 

 

바위취

 

 

시대의 상처를 안고 자라는 소나무 

 

 

좌측으로 올라 우측으로 내려 왔다.  이제부터는 넥타이 코스로 입석으로 하산이다.

 

 

주말인데 생각처럼 등산객이 많치 않다.  가을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새통인데 다행이다.

 

 

입석 아래 어제처럼 계곡에 내려가 시원하게 땀을 씻어 내고 국가지정문화재인 닭실마을로 간다.

 

 

주행중 어제도 스치고 지나가 오늘은 주차를 하고 내려 보았는데 입구를 막고 통제 상태다.  출렁다리 같은데 왜 막아 놓았을까? 

 

 

< 닭 실 마 을  청암정 >

1963년 국내 최초 마을단위의 국가 지정문화재가 되었다가 2009년에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이라는 이름의 명승으로 변경되어 보존되고 있다. 마을에는 국가 지정문화재 5건 482점과 일반동산문화재 2,979점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마을내의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닭실마을은 ‘한과’로도 상당히 이름난 곳으로 5백년 역사의 전통 한과를 만들어 볼 수 있으며 외국인 대상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을 만큼 전통체험으로 특화된 곳이다.        -대한민국구석구석-

 

 

마을입구 마을회관 앞 자판기에서 믹스커피 한잔 뽑으며 주민이신 할아버지와 담소도 나누고 잠시 마을을 둘러 본다.

할아버지는 84살 이신데 방에는 90이 넘으신 분이 두 분 계시고 100짜리 고스톱 치셔서 그 돈으로 커피를 뽑으신다고 ㅎ

청암정을 여쭤보니 마을 좌측 도로 따라 쭉 들어가면 된다고 하신다.

 

 

주택앞으로는 차량통행을 금하는듯..

 

 

청암정은 봉화읍 유곡리 달실마을에 소재하며 충정공 충재 권벌(1478~1548)이 중종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고 우찬성까지 올랐다.

명종때 윤원형이 윤임, 류관, 류인숙 등 3대신을 배척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삭주에 유배되어 그 곳에서 생을 마쳤으며 선조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본 정자는 충재 권벌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곡에 자리잡아 15년간 은거하여 도학연구에 몰두하며 장자 권동보와 함께 구암상에 건립한 정자로서 건축양식이 뛰어나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이 일대는 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청암정은 권벌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로 1526년(중종 21)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주변에 못을 판 후 냇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놓고, 장대석으로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청암정에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청암정은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집으로 주추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을 활용하여 정자를 세운 옛사람들의 지혜와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청암정을 짓고 주위에 연못을 만든 매우 탁월한 조경기법을 볼 수 있다.

 

 

청암정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물속에 든 거북으로 비유된다. 물속에 거북이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이라는 것이다.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마루가 깔려 있다. 처음에는 온돌방으로 꾸며졌고, 바위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집을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데, 바위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가리켜 거북바위라고 말했다. 정자의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아궁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았다고 한다. 이렇게 물을 줌으로써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 수 있었다. 거북바위에 지어진 청암정은 날아갈 듯 날렵한 모습으로 바위 위에 가볍게 올라앉아 있으며, 정자 내에는 ‘청암정’이라는 당호와 함께 미수 허목이 전서체로 쓴 ‘청암수석(靑巖水石)’ 편액이 걸려 있다.

 

 

현판 청암정은 가필이고 진필은 충재 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 충재 박물관 >

충재선생은 관직에 재직하면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라는 두 번의 큰 사화를 겪게 된다.

두 번의 사화시기 충재선생은 결코 특정세력에 얽매이거나 이익을 위해 의를 버리지 않았으며 올바른 시각으로 정국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 사화에 휘말리게 되었고 을사사화 때는 소윤일파의 불순한 전횡에 대해 비판하고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대신들을 구명하기 위해 애쓰다 다시 화를 입게 된 것이다

을사사화로 인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마침내 올바른 재 평가와 함께 복권 및 중직이 연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