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숲길 개방. 구리 동구릉 태조 이성계가 잠들다.

일 시 : 2025. 06. 04 (수)
참 가 : 나홀로
코 스 : 구리역- 동구릉매표소- 제실- 수릉- 헌릉- 건원릉- 목릉- 휘릉- 개방숲길- 원릉- 경릉- 혜릉- 숭릉- 숭릉연지- 관리소
서울둘레길이 끝나니 어딜 갈까 생각중인데 조선왕릉 숲길을 개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동구릉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오늘 실천에 들어 갔다.
구리역2번 출구로 나와 동구릉까지 걸어 갔다. 버스를 타도 되지만 2.7km 30분이면 가능할것 같아 걸었는데 덥다. ㅎ
작년에는 태릉, 강릉 숲길을 개방해서 다녀왔는데 동구릉, 사릉, 광릉이 개방되었다하니 찾아볼 예정이다.

구리역2번 출구로 나와 우측 도로를 따른다.

망우왕숙길이란 길이 또 생겨났구나..

소녀상도 만나고..



8호선 동구릉역 우측으로는 구리농수산물 도매시장 입구가 보이고 동구릉은 횡단보도 건넌다.

8호선 동구릉역 4번 출구로 나오면 쉽고 빠르게 갈 수 있을것 같다. 직진 한다.

쥐똥나무

동구릉역에서 직진하면 도로 끝 부분에서 좌측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동구릉 주차장이 보인다. 구리역에서 버스도 있는데 걸었더니 덥고 갈증이 나서 길건너 편의점에 가서 시원한 하드 하나 사서 입에 넣으니 시원하고 달달하고 좋다 ㅎ

산딸나무

광릉은 수목원이 가고 싶어서 봄부터 친구들이랑 가려고 했는데 실패했고 숲길 핑계로 다시 도전해야 겠다.
자차를 이용하면 편리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아 불편하다.

구리 동구릉은 수도권에 있어서 지하철로 이용이 가능하니 언제고 방문이 가능했는데 이제야 찾아 왔다.
입장료 천원이 있는데 경로우대로 공짜로 입장했다.

동구릉(東九陵)은 ‘동쪽에 있는 9기의 능’이라는 뜻으로, 약 450여 년간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조선 최대의 왕릉군이다. 1408년(태종 8)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이 처음으로 조성되고 이후 문종의 현릉(顯陵), 선조의 목릉(穆陵), 현종의 숭릉(崇陵),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단의왕후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릉(元陵), 헌종의 경릉(景陵)이 차례로 조성되었다. 능이 조성될 때마다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 등으로 불리다가 문조의 수릉(綏陵)의 옮겨지면서 지금의 동구릉이 되었다.
동구릉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왕릉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왕이나 왕후의 능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 나란히 조성한 쌍릉,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한 능에 왕과 왕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 왕과 두 왕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 등 다양한 형태로 조성된 능이 모여있다. - 문화재청_

동구릉 역사문화관은 2011년에 처음 개관하고 2021년에 개편한 전시관으로, ▲세계유산 조선왕릉, ▲동구릉 및 능주 이야기, ▲동구릉의 보물 등으로 구성되었다.

말발도리

동구릉 석물부재로 동구릉 릉내에 왕릉을 보수하거나 옮기는 과정에서 사용하지 않는 석물들이다.

신나무

홍살문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는 몸과 마음가짐을 엄숙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원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동구릉에는 안쪽에 아홉 곳의 능마다 약간 작은 규모의 홍살문이 설치되어 산릉의 참배나 제례가 시작되는 곳을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다.

재실은 왕릉 관리자(종9품 참봉, 종5품 영 등)가 지내는 업무 공간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제실에서 우측 수릉을 시작하여 9개의 릉을 돌아 보고 개방한 숲길도 걷는다.

수릉 가는 길. 오늘 날씨가 27도. 더운날씨인데 이곳은 그늘이 많고 바람이 불어 더운걸 느끼지 못했다.
수 릉(문조와 신정왕후)

수릉(綏陵)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
수릉은 황제로 추존된 문조와 신정황후 조씨의 능이다.
문조는 세자 시절 아버지 순조를 대신하여 정치를 하면서 조선후기의 예악을 다시 정비하였고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22세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라 하였다.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1899년에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신정황후는 1819년 (순조18년) 왕세자빈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되었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 보았을 때 왼쪽에 왕을 오른쪽에 왕후를 모신다. 이와는 달리 수릉은 오른쪽에 왕을 모셨는데 이는 세상을 떠났을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그렇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황제와 황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일반적인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왕(황제)이 왼쪽, 왕비(황후)가 오른쪽에 모셔지지만, 수릉은 반대로 모셔져 있다. 수릉의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의 형태인데 이는 동구릉 중 유일한 형태이다.

정자각


비각

대한 문조익황제수릉 신정익황후부우 비문 조선국 익종대왕수릉 신정왕후부우 비문
익종과 신정왕후에게 존호, 묘호, 시호 등을 올린 시점을 기록한 뒷면의 음기는 고종이 직접 짓고 썼다.
이 비석은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 후 문조익황제로 추존하면서 세운것이라고 한다.


정자각, 비각, 수복방

현 릉(문종과 현덕왕후)

현릉(顯陵) 문종과 현덕왕후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정자각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에 문종의 능, 오른쪽 언덕에 현덕왕후의 능이 있다.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고 재위기간 동안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현덕왕후는 문종의 세번째 세자빈으로 단종을 낳은 후 곧 세상을 떠나 현 경기도 안산에 묘가 조성되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후로 높여져 능의 이름을 소릉이라 하였다.
세조 대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현덕왕후도 같이 폐위되어 능이 다른 곳에 이장되었다. 1513년 현덕왕후 복위 후에 능이 문종의 현릉 오른쪽 언덕으로 옮겨졌다.
현릉의 문종 능침은 조선시대 기본 예전인『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모습이나 봉분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좌측 수라간, 정자각, 우측 수복방, 비각이 있다. 정자각 뒤에는 문종의 릉이다.


조선국 문종대왕현릉 현덕왕후부좌강


제초작업을 하는건 아닌데 시커먼 기계가 로봇청소기 처럼 풀밭을 혼자 배회하고 있다.

문종과 현덕왕후의 릉이다.
건 원 릉(태조 이성계)

건원릉 홍살문과 정자각, 수복방과 수라간 뒤로 비각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이다. 태조는 1392년에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기간 동안 나라의 이름을 조선으로 정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는 등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408년(태종8년)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능이 조성되었고 1899년 태조고황제로 추존도었다.
건원릉은 독특하게 억새(청완)로 덮여 있다. 이는 태조가 자신의 고향인 함흥의 억새를 심어달라는 유언데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능 아래는 정자각(보물)과 신도비(보물)가 있다.

정자각은 제향을 지내는 건물로 지붕 위에서 봤을때 丁자 모양으로 보여 정자각이라 한다.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에 건원릉과 함께 건립되었다. 그 후 여러차례 수리를 하였고 1764년(영조 40) 중수청을 설치하여 크게 보수하였다. 건원릉 정자각은 국조오례의, 길례의 단묘도설과 비교할 때 건립 당시의 기본적인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조선왕릉 조영제도에 있어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축물로서 그 가치가 크다. 보물지정 (2011. 12. 26)

건원릉 전경이다. 바람에 봉분의 억새가 출렁이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주변에 억새를 키우는 양묘장이 따로 있다고 한다.

바람이 출렁이던 억새가 동영상을 찍으려니 바람이 잔잔해 졌다 ㅋ

소전대와 비각의 모습이다. 소전대는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이곳 건원릉과 정릉, 태종의 헌릉에만 있고 이후에는 소전대가 사라지고 예감이 그 역할을 대산하게 된다.

대한 태조고황제건원릉 태조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 태조건원릉비

수라간과 정자각 사이로 봉분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 건원릉의 가장 큰 특징은 봉분 위에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가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의 흙과 억새로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재위한 기간은 6년밖에 안된다. 그는 말년에 자식들이 벌이는 골육상잔의 권력 다툼 앞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고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고향인 함흥에서 칩거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인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는데 제사의 어려움이 있어 타협점을 찾은 것이 오늘날까지도 건원릉 봉분의 억새로 남아 있다.

시간을 맞추면 해설사의 설명을 들을수도 있다. 나는 기다리기 싫어서 단독으로 다녔다.

건원릉 금천교를 건너 목릉으로 이동 한다.

목 릉(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

목릉(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에 선조의 능, 가운데 언덕에 의인왕후의 능, 오른쪽 언덕에 인목왕후의 능이 있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아들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선조 대에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나와 이 때를 목릉성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인왕후는 1569년(선조2년)에 왕비가 되어 정유재란이 끝난 후 세상을 떠나 목릉에 처음 모셔졌다. 인목왕후는 1602년에 왕비가 되었고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을 대비의 자격으로 허락하기도 하였다.
목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다포 형식의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목릉의 정자각과 우측 비각. 정자각 뒤로 선조의 릉과 의인왕후의 릉이 있다.

인목왕후의 릉과 수복방


선조와 의인왕후


조선국 선조대왕 목릉 의인왕후 부중강 인목왕후 부좌강


정자각, 비각, 어정, 뒤로 선조대왕 릉

기념 셀카 남겨 보고 ㅎ

가락지나물

목릉을 나와 다리를 건너 휘릉으로 간다.
휘 릉(인조비 장렬왕후)

휘릉(인조비 장렬왕후)
휘릉은 조선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16년)에 왕비가 되었고 1649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되었다.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3대에 걸쳐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현종 대에 있었던 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장 기간 중 장렬왕후가 상복을 입을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대립하기도 하였다. (예송논쟁)
휘릉의 혼유석을 받치는 돌인 고석은 건원릉의 예에 따라 다섯 개를 두었고 정자각은 정전 양 옆에 익랑이 있다.
* 예송논쟁: 효종과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되는 장렬왕후의 상복을 입을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두차례에 걸쳐 대립함. 1차 때는 서인이, 2차 때는 남인이 승리함
* 익랑: 정전 양옆에 날개처럼 기둥을 덧붙여 지은 행랑

참도는 혼령이 이용하는 향로와 참배자(황 또는 제관)가 이용하는 어로로 구분된다.
좌측의 향로가 능의 주인인 신이 다니는 길로 우측의 어로보다 약10센티미터 정도 높고 넓다.
안내인은 향로는 신이 다니는 길이니 우리는 어로를 이용하면 된다고 알려 주셨다.

전각 붉은 기둥의 아래에는 흰색과 위에는 푸른색으로 주근도배를 칠하였다.
하얀색은 구름을 상징하고 파란 테두리는 하늘을 상징한다.
정자각을 멀리에서 보면 하늘(구름)에 떠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하여 운상각이라고도 한다.
이는 구름위는 신들이 노니는 공간으로 정자각이 천국에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도 불 수 있다라고 한다.

예감이라고 하는데 어정과 뭐가 다른가?


조선국 장렬왕후 휘릉

휘릉 정자각은 동구릉에 있는 다른 정자각과 달리 정전 양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휘릉을 나오면 개방된 숲길이 시작 된다.



빨간 점선이 숲길 개방구간이다.
원 릉(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원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앞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원릉은 영조 대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의 예를 따라 조성되었고, 비각 안에는 3개의 표석(영종대왕 원릉, 영조대왕 원릉, 정순왕후 부좌)이 있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옛 영릉자리였으나 영릉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생겨 계속 보수를 하다가 1673년(현종14) 여주로 옮기게 되면서 터만 남아 있었다. 이후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옛 영릉 자리에 원릉이 조성되었다.
원래 영조는 1757년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되기를 원하였지만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영조의 능자리로 대신들의 의견이 나누어지자 정조는 지금의 자리를 영조의 능자리로 결정하였다. 이후 1805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능 동쪽에 능을 조성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처마의 용두와 잡상을 찍어 보았다. 잡상의 모양이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라고 한다.
조선왕릉 처마에 왜 서유기의 캐릭터가 등장할까 궁금해서 물어 봤는데 서유기 일행이 108요괴를 없애는것처럼 하늘과 땅에서 몰려오는 모든 사악한 잡귀를 물리치라는 의미라고 한다.

비각

조선국 영조대왕 원릉

조선국 정순왕후 부좌
정순왕후 김씨는 영종(영조)대왕의 두 번째 왕비이다. 1759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776년에 정종(정조)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로 올렸다. 1800년 금상(순조)이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에 오른 후 수렴청정을 3년 하다가 특명으로 수렴청정을 거뒀다.

영조는 재위 가간 동안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큰 과제로 삼아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균형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 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특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신공을 혁파하였다.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 제도를 개펀하여 '속오례의'를 간행하였고 장례에 관한 일을 개편하여 '국조상례보편'을 편찬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1762년(영조38)에는 왕세자(사도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과도한 경계심으로 왕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 못하였다.
1776년(영조52)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오래 재위(52여년)하였고 가장 오래 살았다.
세상을 떠난 후 묘호를 영종이라 하였다가 1890년(고종27) 영조로 추존하였다. -궁능유적본부-

영도대왕 릉인 원릉을 나와 이제 술길을 따라 경릉으로 간다.


개갓냉이
경릉(헌종과 효현황후, 효정황후)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과 첫 번째 황후 효현황후 김씨, 두 번째 황후 효정황후 홍씨의 능이다.
조선왕릉 중 유일한 삼연릉 형태로 정자각 쪽에서 능을 바라 보았을 때 왼쪽에 현종의 능, 가운데에 효현황후의 능, 오른쪽에 효정황후의 능이 있다.
헌종은 8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 순원황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세도 정치로 어려움을 겪었다.
1908년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효현황후는 1837년(헌종3년)왕비가 되었으나 16세로 세상을 떠나 경릉에 첫 번째로 모셔졌다. 효정황후는 1843년(헌종7년)에 왕비가 되었으며 1904년 세상을 떠나 경릉에 마지막으로 모셔졌다. 경릉은 각 능 앞에 혼유석이 배치되어 있고 세 능 모두 난간석만 설치되어 있다.
*삼연릉: 한 개의 곡장 안에 세 개의 능을 나란하게 배치한 형태

대한 현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


헌종은 재위기간 동안 외척 세도정치와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나 정치적으로 혼란하였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하였다. 또 두 차례의 천주교 탄압(기해박해, 병오박해)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하였다.
재위 말년에는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 등을 편찬하였고 각 도의 제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이후 1849년(헌종15)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에 헌종성황제로 추존되었다.


방향을 바꿔 숭릉과 혜릉이 남았다. 먼저 혜릉으로 간다.

봄맞이꽃
혜릉(경종비 단의왕후)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 왕후는 1696년(숙종22년)에 왕세자빈이 되었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에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모셔졌다. 이 후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의왕후로 추존 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다.
1722년(경종2년)에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을 새로 세웠다.
혜릉의 석물은 명릉(숙중과 인현왕후)의 제도에 따라 사실적으로 만들어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사람의 크기와같은 것이 특징이다.

수라간, 정자작, 수복방, 비각이 있다.

조선국 단의왕후 혜릉


정작각 잡상의 모습. 용두와 손오공, 삼장법사, 저팔계의 모습

주름잎꽃

마지막 9번째 숭릉으로 간다.
숭릉(현좡과 명성왕후)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아들로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났다. 왕위에 오른 후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에송논쟁으로 붕당 싸움이 치열한 상황을 겪기도 하였다.
명성왕후는 1659년에 왕비가 되었다. 현종과의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 명혜, 명안공주)를 두었다.
숭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의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에송논쟁: 효종과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되는 장령왕후의 상복을 입을 기간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두 차례에 결쳐 대립함. 1차 때는 서인이, 2차 때는 남인이 승리함

보물로 지정된 왕릉 정자각과 쌍릉의 모습


조선국 현종대왕 숭릉 명성왕후 부좌


왕릉을 들어서기 위한 첫 관문은 홍살문 앞에 있는 금천교라는 다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 홍살문 20~50여 미터 정도 앞에 있으나 지형에 따라서더 멀리 있는 곳도 있다.
금천교는 훼손되어 없어진 곳도 많이 있으며 길이는 2미터 정도 폭은 지형에 따라서 다르나 3~4미터 정도 되며 길쭉한 돌을 6개에서 8개를 올려 놓았다.
길이가 조금 긴 곳은 중간에 지지돌을 놓고 앞뒤로 돌을 올려 놓았으며 대부분의 금천교 네 귀퉁이에는 돌이 밀려나지 않도록 돌기둥을 박아 놓는다.

다리를 건너 숭릉 연지에 도착했다.
숭릉연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사상에 따라 연못을 조성한 것이며 땅을 상징하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둘레와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모양의 섬을 가운데 둔것이라 한다.


연지에 왜가리 두 마리가 우두커니 있다.

숭릉 연지는 1674년(숙종 즉위) 왕과 앙후의 능을 만들 때의 담당 기관인 산릉도감에서 조성한 연못이다.
네모난 형태에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형으로 네모는 땅을,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는 우주관과 자연관이 담겨 있다.
동구릉 내 9기의 왕릉 가운데 숭릉에만 연지를 두었는데 이는 동구릉 내에 형성된 3개의 물길(건원릉과 휘릉 사이, 원릉과 경릉 사이, 숭릉과 혜릉 사이)을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연지는 처음 조성 된 숙종 대 부터 영조, 정조, 고종 대까지 연못 둘레의 돌 축대를 정비하고 연꽃 종자를 능관에게 주어 심고 기르게 한 기록이 전한다. 이를 볼 때 당시 연지에는 연꽃이 무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릉 연지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점차 자연적, 인위적 원인으로 물이 드나드는 입. 출수구 등 제방 시설이 없어지고 변형 되는 등 경관이 크게 훼손 되었다. 이에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시. 발굴 조사를 한 후 2017년 보수. 정비를 마쳤다.
현재 숭릉 연지의 면적은 약 4.941평방미터이고 평균 수심은 약 50cm 정도이다.

다시 재실로 돌아 오며 동구릉 탐방을 마친다.

세습제를 유지하던 조선왕조의 일가족 묘를 둘러 보았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태릉과 강릉이 있고 의릉은 지척에 있지만 자주 찾아 보지는 못한다. 오늘 동구릉을 둘러 보고 답사기를 쓰며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보던 태조 이성계와 영조의 릉을 볼때 더욱 관심을 갖고 본것 같다.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책봉 되어 구중궁궐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감하는 빈과 왕후의 일생을 관심있게 읽어 보기도 했다.
이번에 동구릉과 사릉, 광을을 개방했다고 했는데 내친김에 못가본 다른 릉도 둘러보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