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07.03.27
참 가 : 자이언트산악회
코 스 : 특리교- 안부- 필봉산- 여우재- 왕산- 억새군락- 전망바위- 망경대- 유의태약수터- 구형왕릉
가락국의 멸망을 지켜본 구형왕의 능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이 활쏘기를 했다는 사대(射臺)가 있는 왕산과 선비의 고장인 산청을 상징한다는 필봉산은 산청군 금서면 일대에 높이 솟아있다.
왕산의 옛 이름은 태왕산이라고 하였는데 아마 가락국의 궁궐 이름도 태왕궁이 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추측되고 수로왕이 만년에 이 곳에 와서 휴양했다고 가락국 양왕신도비에 새겨져 있으며, 왕산은 가락국의 왕과 많은 사연이 있음을 알려주는 지명 즉 왕등재, 국골,깃대봉, 각종 기록이나 문헌에도 있어 왕산이라 하였던 것 같다.
여우고개에서 보이는 필봉의 모습은 독특하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산의 이름대로 붓끝을 연상해 필봉(筆峰) 또는 문필봉 (文筆峰)으로도 볼 수 있겠으나 혹자는 여인의 가슴을 연상해 유방봉, 유두봉으로 부르기도 한다.높이는 이웃한 왕산보다 75cm가 낮지만 산의 모습이 인상적이라 시야에는 필봉산이 먼저 들어온다. 필봉산 정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바윗덩어리로만 이루어져 있는데다 뽀족하고 사방이 가파른 급경사라 여우재쪽 외에는 접근하기가 까다롭다.
이곳 특리교 다리 건너 바로 하차하여 도로 건너편 계곡 건너 등산로가 시작된다
특리교 아래쪽으로는 전통한방휴양관광단지 조성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생강나무와 진달래가 활짝 피어 봄산행의 맛을 더해준다
가는그늘사초
예로부터 지리산을 비롯한 산청 인근의 산에는 2,400여종의 약초가 자생하는 한약의 보고였다. 지금도 지리산과 왕산 그리고 필봉산 자락은 맑은 물과 효험이 뛰어난 수많은 약초가 자생하고 있다.
허준이 대롱밥 매고 약초를 캐러 다녔다면 아마도 지리산과 왕산 그리고 필봉산이었을 것이다. 이 중
왕산은 자생 약초뿐만 아니라 가락국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곳으로 유명하다.
오늘 산행지는 오지산행이라고 하는데 오지산행이라기에는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있다
선두그릅은 벌써 필봉산을 밟으며 팔을 휘젓고 있는데 나는 아직 아랫봉우리에서 올려다보며 땀을 훔쳐내며 한숨 돌린다. 어제 오후 북한산을 4시간여 산행한뒤에 생각지도 않은 산행을 별안간 하게 되어
오늘 다리도 쪼매 아프고 힘도 들지만 단체 산행에서 뒤쳐지면 누가 될까 부지런히 쫓아가려니 따뜻한
날씨 탓도 있지만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필봉산 정상 아래에서 간단한 요기를 하고 다시 산행..
산청읍일대
지리산 천왕봉에서 웅석봉까지 길게 뻗은 산자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데 안개속에 천왕봉이
흐릿하다
사방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어 시야가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장관이다
급경사 바윗길을 지나면 편안한 숲길이 이어진다
왕산의 모습이 보인다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이곳에 묻혔있어 산 이름이 왕산으로 불린다 한다
억새군락지
능선에서 바라본 필봉산.. 역시 유두봉이라 불릴만하지 않을까 ㅎㅎ
정상비석
고려에서 판서벼슬을 한 농은 민암부가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산청에 낙향해 살면서 이
바위에 올라 송도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래서 후대인들이 서울(개성)을 바라보는 바위로 이름을 붙인 것이라 추측된다
이 바위 뒷면에도 민씨 일가의 명단이 쫘악 써있다
여기서 부터는 좌측방향으로 산허리를 가르는 등산로를 한참 가야 한다
드라마 허준’에 나오는 명의 유의태가 약수로 사용했다는 약수터
이제 산행은 끝났다. 11시 반에 산행시작하여 3시..
구형왕릉은 자연석을 모아 피라밋 형식으로 쌓다가 봉우리를 동그랗게 만들었다. 일부 학자들은 탑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180여년전에 발견된 왕산사기(王山寺記)에 의해 왕릉임이 증명되었다.
금관가야의 10대(마지막왕) 왕릉이다. 구형왕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시다
구형왕은 가락국의 제 10대 왕으로 서기 532년 신라의 법흥왕에게 부인과 아들 셋을 데리고 가서 나라를 넘겨주었으며, 그래서 양왕(讓王)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강대국 신라가 끊임없이 침공을 하던 중, 법흥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오자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했으나 적병의 수가 너무 많아 싸울 수가 없어 양왕은 군사와 백성의 희생을 막고자 싸움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주었는데, ‘사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기지 못할 전쟁에서는 백성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 국왕의 도리’라 생각하고, ‘가야의 백성을 노예로 삼지 않고, 양민으로서 신라백성으로 받아주기로 하는 합의’를 하여 합병한 후에 방장산, 즉 지리산 동쪽 기슭의 수정궁에 기거하시다 붕어하였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활을 쏘았다는 사대비
오늘 산행지도 좋았지만 구형왕릉을 보게 되어 산행의 맛이 두배로 느껴진다. 우린 말했다 "산행에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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