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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금오산(남산)471m, 고위산495m(경북 경주)

by 아 짐 2008. 3. 24.

100대 명산 (산림청 선정)

o 길이 약 8km, 폭 약 4㎞의 산줄기안에 불상 80여체, 탑 60여기, 절터 110여 개소가 산재하여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등 신라시대 역사 유물·유적의 보고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
o `경주남산불적지'로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칠불암마애석불 등이 유명. 동쪽에는 남산산성 등이 있음

 

 일 시 : 2008. 03. 23

참 가 : 자이안트산악회

코 스 : 틈수골- 고위산- 금오산- 상사바위- 상선암-  마애불- 삼릉- 경애릉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 남쪽에 남북으로 솟아 있는 산. 고위산(高位山, 494m)과 금오산(金鰲山, 468m) 등 2개의 봉우리가 남산을 대표하는데, 이 중 금오산은 남산을 통칭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남북길이 8㎞, 동서길이 12㎞, 34곳의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남산의 동쪽에는 낭산(狼山)·명활산(明活山), 서쪽에는 선도산(仙桃山)·벽도산(碧桃山)·옥녀봉(玉女峰), 북쪽에는 금강산(金剛山)·금학산(金鶴山)이 솟아 있으며 토함산(吐含山)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남산에서는 BC 10∼BC 6세기 무렵의 유물로 추정되는 민무늬토기·간돌도끼[磨製石斧(마제석부)]·간돌칼[磨製石刀(마제석도)]·홈자귀[有溝石斧(유구석부)]·방적차(紡績車)와 함께 고인돌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남산은 또한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蘿井), 신라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신라가 종말을 맞았던 포석정(鮑石亭)이 있던 곳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개국 이래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남산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지로서도 이름이 나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면서 숭산신앙(崇山信仰)·암석신앙과 연관된 불교문화는 남산에 집중, 표현되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유적은 절터 112군데(암자터 포함), 석불 80체, 석탑 61기, 석등 22기 등이다. 금오산·고위산·도당산(都堂山)·양산(楊山) 일대 즉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을 비롯한 4개 동과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內南面) 용장리(茸長里) 등 1813만 4635㎡의 지역이 1985년 사적 제311호 <경주남산일원>으로 지정되었다.

 

주말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기상청은 일요일 오전부터 점차적으로 걷힐것이라고..

지방산을 가면 거의 11시경부터 산행을 시작하니까 잠시 비를 맞으면 산행하는데 무리가 없겠거니 하며 가자산악회의 계룡산을 예약하고 일요일 6시50분 군자역에 도착했다.  항상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가 보이질 않는다. 비가 와서 늦나 하고 잠시 기다렸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회장님께 전화를 걸었더니 산행이 취소되었노라고.. 이런 기가 막힌일이.. 난 예약을 했기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서

우산쓰고 여기까지 왔는데..

기왕 챙겨 나온거 아찌랑 군자에서 5호선을 타고 남한산성을 가자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자이안트산악회 후미대장인 임대장님을 만났다. 오늘 경주 남산을 간다고 같이 가자고.. 이래서 별안간 남산을 가게 되었다.

사실 남산을 가고 싶었었는데 가자산악회가 이번 일요일부터 처음으로 일요산행을 시작하는거라 나는 일부러 산행지를 그곳 계룡산으로

선택했는데 결국은 내가 가고 싶은 남산을 가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하나?

비가 끝없이 내린다. 거의 12시가 다 되어서 산행을 시작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행을 토함산과 남산 두 팀으로 나눠서 하는 연유로 이곳에서 먼저 남산팀을 내려놓고 버스는 토함산으로 향했다. 나는 남산으로..

주택 좌측으로 오른다. 

 

한동안 오솔길 같은 닦여진 이런 길을 걷게 된다.

 

산으로 오르자 흙이 쓸려 내려간 뿌리가 드러난 너무 아파 보이는 나무가 부지기수다. 비가 와서 더 쓸려 내겨가기 전에 흙을 덮어줘야

하지 않을까..

 

능선에 오르니 크고 작은 암릉길을 오르고 그칠줄 모르는 비 때문에 주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치만 바위와 소나무가 멋지다.

 

거의 다 올라 다닐수있는 암릉길인데 대부분 바위가 젖어 우회했다.

 

산행 시작 50분만에 고위산 정상에 도착했다.

 

저곳을 건너 넘어가는데 숏다리 마눌 못넘어 올까봐 아찌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같이 다니니까 좋은데 ㅎㅎ

 

칠불암 방향으로..

 

빗방울 머금은 생강나무의 촉촉한 모습이 아름답다

 

산정의 너른 바위지대에서 잠시 숨도 돌리고..

 

봉화대도 못가고 칠불암도 못가고.. 금오봉으로..

 

집채만한 바위 사이길로 내리막..

 

 

세계문화유산인 남산이 너무 황폐해져가는것은 아닌지.. 하기사 복구한다고 돌을 쌓고 이래저래 불편하지만.. 온통 송림으로 푸르른산..

등산로를 걸을때도 마치 황토흙인양 붉게 퇴색한 솔잎을 밟고 걷게 된다. 느낌이 좋다.

 

 

 

금오산 가기전 잠시 임도로 내려서 가게 되었다. 아마 능선이 암릉이라 선두에서 임도를 선택했는듯.. 임도의 우측에 커다란 할아버지

얼굴 형상이 뚜렷한 바위가 있다. 어쩌면 저렇게 사람의 형상인지 신기하다.

 

임도에서 금오산으로 오르는 길은 질척거리고 엉망이다. 가파르게 등산로로 오르느라 신발도 엉망이고..

황금빛 거북 모양의 봉우리란 뜻의 금오산.. 난 금오산의 오짜가 흔한 까마귀 오짜인줄 알았더니 자라 鰲자이다. 매월당 김시습의 한문소설 금오신화의 제목이기도 한 금오이다. 금오봉 남쪽 중턱의 용장사에서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용장사터와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산 전체가 유물전시관과 같다는 남산.. 부연 안개속에 눈앞의 모습밖에는 아무것도 볼수 없어 답답하지만 보이는 부분이라도 열심히

보려고 노력하며 다녔다. 얼떨결에 따라나선 남산이지만 아무래도 날 좋은날 다시 와야 할것 같다. 봐야할곳이 무궁무진하다.

 

 

상사바위의 옆모습 

상사바위의 전설

경주 동남산 어느 마을에 할아버지가 외로이 살면서 이웃집의 피리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 했다. 어느덧 피리는 꽃다운 처녀가 되어

피리가 이사를 가게되자 할아버지는 몹시 쓸쓸해 했다. 그 후 어느 날 피리처녀가 할아버지의 방문을 열며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하며 "피리야!"하고 외쳤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안돼! 안될 일이지"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저으며 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꿈속에까지 피리소녀를 그리워하던 할아버지는 피리를 잊으려고 무척 애를 쓰며 고민하다가 끝내 남산의 어느 골짜기 나무에 목을 매 죽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혼은 골짜기 위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사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부터 피리는 큰 뱀이 몸을 휘감고 덤벼드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루는 피리의 꿈속에서 뱀이 할아버지로 변해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너를 잊으려해도 잊을 수 없구나.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 피리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죽음을 헤아리고 무척

슬퍼했다. "할아버지! 이제 나이를 먹지 않는 바위가 되어 소원을 풀어드리겠어요." 피리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기로 작정하고 바위에 올라 뛰어 내렸다. 피리소녀의 영혼은 작은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바위 곁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다. 상사바위는 동남산 국사골 정상에 우뚝 솟아있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이 불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金鰲峰)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로 삼았는데 깍아내다가 그만둔듯 거칠다. 높이 7m로 냉골(三陵溪)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고 남산의 북봉인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 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져 있으며 가슴부분의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한 양 다리의 발 표현과

연꽃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상선암 대웅전의 모습 

조금은 허술해 보이는 작은 암자 두채가 기억자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에서는 보살님이신지 스님이신지 짙은 향내 풍기며 예불

중이다. 자그마한 암자에 대웅전이라 써있으니 조금은 쌩뚱맞은듯..

상선암 우측으로 가파른 나무계단 내리막이다. 냉골 계곡으로 들어선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며 우측으로 보물인 석불좌상이 있다. 올라가는 길에는 양쪽으로 줄로 팬스 설치를 해놓아 좁은 통로외에는 접근을

막는다.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 정비공사중으로 이렇게 비닐로 덮여있다.

이 불상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중턱에 위치한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나발)을 붙였고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육계)가 있다. 얼굴은 풍만한 모습으로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한쪽 어깨에 옷을 걸쳤으며 원래 불신(佛身)과 불상 받침과 불상 뒤의 원광인 광배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지금은 얼굴이

크게 손상이 되었다.

석불이 앉아있는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창 모양의 안상(眼象)을 비롯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천년의 역사를 안고 흐르는 계곡은 또다른 봄을 맞아 쫄졸 거리며 꽃을 피우고 잎을 돋우며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이 불상은 남산에서는 드물게 선각으로 된 여섯분의 불상이 두개의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안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오른 어깨에만 법의를 걸치고 연꽃 대좌에 앉아 있다. 머리 둘레에 두광(頭光)만 새기고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세기지 않았으며 왼손은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올린 모습이다. 그 좌우에는 연꽃대좌에 두광만 조각되고 방울 3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보살 두 분이 서 있다. 보통 이 세분을 석가 삼존이라 부른다.  

앞쪽 바위면 가운데 본존이 서고 좌우의 보살은 끓어 앉은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본존은 연꽃 위에 서서 왼손은 아래에, 오른손은 위에서

서로 마주보게 하고  두광만 조각 되어 있다. 그 좌우의 보살상은 웃옷을 벋고 한쪽 무릎을 세운 모습을 하였다.

손에는 꽃쟁반을 받쳐 들고 있는데 두광만 조각되었으며 목에는 구슬 2개를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하였다. 이를 아미타삼존이라고 한다.

오른쪽 암벽 위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호하기 이한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삼릉 : 아달라왕·신덕왕·경명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3개의 왕릉(삼릉·사적 제219호)

 

 

 

 

삼릉과 경애왕릉을 연결해 주는 다리

 

경애왕릉(사적222호)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924~927)을 모신 곳이다. 밑 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1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남산의 북서쪽 끝이자 인천(麟川:기린내)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왕은 제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에서 잔치(연회)를 베풀고 있을때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생을 마쳤다.

 

 

 

 

 

 

  

 

 

 

 

고려의 첩자인 풍수쟁이가 신라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서울은 봉황새의 둥지형상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 봉황새들은 집을 버리고 날아가려 합니다. 장안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봉황새는 알을 두고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풍수쟁이의 말에 임금은 서라벌 곳곳에 산더미 같은 알 즉 봉황대를 수없이 만들었다. 그러나 신라는 쇠락해 멸망하고 말았다. 사실 서라벌 땅은 전진하는 배의 형상으로 수많은 고분의 무게를 못 이겨 침몰한 것이다. 고려의 첩자 풍수쟁이의 계략에 넘어가 신라가 멸망했다는 일화다.
도심에 산재한 많은 왕릉을 두고 후대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지어낸 전설이다. 하지만 이곳 지형은 실제로 전진하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남산 끝자락 도당산은 그 모습이 배의 돛대 같다고 해서 일명 장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