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크린

독립영화 - 아빠 -

by 아 짐 2005. 10. 22.

 

장애인의 성을 소재로한 독립영화 <아빠>

한해 독립영화의 성과들을 총화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아빠>라는 극영화가 뜨거운 논쟁을 촉발시켰다.

<아빠>라는 제목에서는 언뜻 가족애의 따뜻함을 상상하기 쉽지만 사실 이 영화는 장애인의 성을

성매매와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영화제가 유일한 상영공간인 독립영화의 특성상 필자는 반년을 훌쩍 뛰어넘은 6월말이 되어서야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었다.

80년대, 주류미디어로부터 소외받은 인권을 꾸준히 카메라에 담아왔던 독립영화는 90년대를 거치며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노인 등 긴 시간동안 거대담론의 한 켠에서 소외되어왔던 또다른 소수자(마이너리티)들을 조명해내고 있다. 그 중 장애인에 관한 독립영화는 2000년대를 거치며 부쩍 늘고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다루거나 장애인들의 일상을 다룬 장애인 관련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면서 장애인의 인권과 삶을 재조명해왔고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극영화 분야에서도 장애를 소재로한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장애인의 성이 새로운 화두다. 이것은 장애운동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장애인의 성에 대한 문제는 이동권, 노동권, 교육권과 함께 그동안 무성의 존재로만 여겨왔던 장애인의 자기권리 찾기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 또한 <나는 행복하다> 세 번째 이야기로 정신지체인의 성과 사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에 있었기에 <아빠>에 대한 소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를 만든 이수진 감독의 연출의 변은 단 한 줄이다. “아빠는 민주를 사랑한다”. 이 당연해보이는 짧은 문장이 얼마나 큰 파장으로 다가오는지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정신지체장애인 딸 민주와 아빠가 등장한다.

민주는 언제부턴가 성욕을 느끼고 온 몸을 자해하는 딸을 보다 못한 아버지가 거리로 나선다.  “학생, 내가 부탁이 있는데…”, 우리 딸은 예쁘다고, 한 번만, 한 번만을 애원하며 아버지는 돈뭉치를 보여준다.

담당의사는 다른 방법도 있는데 왜 그렇게 성욕에만 집착하냐고 아빠를 나무라고 미친 사람 취급을 받으며 경찰서까지 들락거리던 아빠는, 결국 결단을 내린다.

관객과의 대화도 뜨거운 <아빠>를 보고 돌아오는 동안 갑자기 어린 시절의 일화가 떠올랐다. 
시골 학교의 운동회, 오후가 되면 동네어른들의 잔치가 된다.

부락대항 이어달리기 순서에서 운동장은 한바탕 뒤집어졌다.

바톤을 이어받으며 손에 땀을 쥐는 레이스를 펼치는 순간, 친척아저씨가 트랙을 무시한 채 성큼 운동장을 가로질러 1등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1등이 아니라고도, 1등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그 난감한 상황은 게임의 법칙과 관련있다.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게임의 법칙을 친척아저씨만은 몰랐던 것이다.

다소 엉뚱해보이는 이 예를 드는 이유는 물론 <아빠>와 상관있다. 이 영화는 묘하게 현실을 비튼다.

영화 중간에 고민하던 아빠의 눈에 비친 건 장애인 시설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극영화의 설정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다.

이수진 감독은 극영화 중간에 실사장면을 삽입함으로써 리얼리티를 확보하려했던 것같다.

아빠의 눈에 비친 건 스킨쉽을 주고받는 장애청소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언뜻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이 풍경에는 중요한 차이가 간과되어있다. 그들은 남성이다. 이수진 감독은 민주 뿐 아니라 다른 장애인들 또한 성욕을 느끼고 나름대로 해소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실사장면에서 등장하는 장애인은 남성이다.

이수진 감독은(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남성이다)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현실을 비약한다.

남성의 성욕과 여성의 성욕은 그 양태가 다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의 성욕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경향적으로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 사실은 간과된 채 장애인의 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다.

두 번째 비약.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장애 현실에서 근친상간은 드문 일이 아니다. 충격적이게도 그렇다. 정신지체장애인의 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면서 필자는 몇 번씩 절망했다.

보편적인 가치로 여겨왔던 부성애가 남성의 욕망 앞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상황을 목도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딸, 몸은 다 자랐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딸을 어떤 아버지들은 욕망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정신지체장애인의 성문제 해결을 위한 심포지엄>을 준비하던 작년 가을, 필자는 ‘기도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말 한마디만을 붙들고 눈물 흘린 적이 있었다.

현황을 소개하는 영상물을 만들기 위해 십여명의 정신지체장애인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아픈 이야기들을 들었던 것이다.

영화 속 아빠는 민주의 성욕을 해결해주기 위해 섹스를 하지만 영화 밖에서 만났던 다른 아빠들은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딸을 이용한다. <아빠>의 충격적인 결말은 그래서 소름이 끼쳤다.

어떤 관객은 <아빠>를 통해 무성의 존재로만 여겨왔던 장애인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는 기특한 의견을 남기기도 했지만 <아빠>는 필자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사실적인 영화를 위해 취재를 열심히 해도, 참신한 미장센으로 일상의 잔인함을 정확하게 포착을 해도, 선 자리가 다르면 이렇게 다르다.

이수진 감독은 게임의 법칙을 어겼다. 자극적인 내러티브로 화제의 중심에는 도달했을지 모르지만
소재주의의 희생양으로 장애인을 소모시켰다는 혐의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옐로 카드 하나 더. 마이너리그에서는 모든 소수자들이 동등하게 참여해야 한다. 말하자면 여성 또한 장애인과 동등하게 다뤄졌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차이를 간과할 때 영화는 현실을 왜곡한다. <아빠>처럼.                                                   류미례기자

  - 펌 -

'스크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청연  (0) 2006.01.07
태풍  (0) 2005.12.29
그림형제 : 마르바덴 숲의 전설  (0) 2005.11.20
웰컴투 동막골  (0) 2005.09.03
나라야마 부시코  (0) 2005.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