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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

두륜산 대흥사 (전남 해남)

by 아 짐 2007. 8. 13.

2007. 08. 04

 

대둔사(대흥사)는 해남읍에서 동남쪽으로 12km쯤  떨어진 두륜산 도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무령왕 14년에 신라 승려인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며, 그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다. 선조 37년(1604)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스님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렵혀지지 않을 곳" 이라며 해남 대둔사에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두라고 부탁했다. 그 후로 절은 사세가 번창하고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았다. 일제 때는 대흥사라 고쳐불리다가 1993년 대둔사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서산대사는 조선중종-선조대의 고승으로 임진왜란당시 의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지킨 인물로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나 묘향산, 금강산등에서 산사의 생활을 하였다.  그는 소년시절 진사시에 낙방하고 호남의 산수를 유람하다가 출가하는 계기를 맞는다. 소백산맥이  서해 바다로 향해 달리는 남쪽 끝에 자리한 두륜산에 아도화상의 모후 소지부인을 위해 대둔사를 창건하였는데 서산대사가 대도량으로 키우면서 대흥사로 부르게 되었다.

서산대사는 바다와 산이 이곳을 둘러싸안고 있는데다 골짜기 또한 그윽하여 만세의 땅 삼재불입지처 만년불파지지 종통소귀지처(三災不入之處 萬年不破之地 宗統所歸之處)라 하였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휘하의 승군총본영이 있었다. 왜란에 선조대왕이 의주로 피난 하자 그는 전국의 승군 5천명을 모아 관군을 도왔는데, 사명은 강원도 금강산에서, 처영은 전라도 지리산에서, 해안은 경상도에서,영규는 충청도에서 승군을 일으켜 스승인 서산을

돕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73세의 고령으로 평양탈환에 공을 세우자 선조는 팔도 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總攝)이라는

최고의 승직을 내리려하였으나 나이를 내세워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이여송은 서산대사에게 송시(頌詩)를 한편 보내왔으며 이것은 판각으로 새겨 묘향산 보현사와 밀양표충사에 보관되고 기타의 유물은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다.
                   
         송시 (訟詩)

          공리(功利)야 생각없고 불도만 닦았고나.
          나라일 위급하니 산을 내려왔도다.

그는 선종과 교종의 통합에 힘쓰다가 1604년(선조 37년)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멸하였다. 저술로 "선가귀감(禪家龜鑑)"과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다.                               -한국관광공사 자료-

 

대흥사 일주문

대흥사의 특징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뚜렷한 특징이 없는것이 특징이라고..

봄이면 수줍은 신록을, 여름이면 무성한 녹음을, 가을이면 은은한 단풍을, 겨울이면 고담(枯淡)한 맛을 풍기는, 마치 어머니의 품속같은 편안 함을 느끼게 된다.

 

대흥사 부도전

56기의 부도탑이 있는데 한사찰의 경내에 이처럼 많은 부도가 조성된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곳이 유일하다.

이곳에는 호국의병대사인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그의 門徒들 중 초의, 호암, 상월 등 13분의 대종사와 만화, 원오, 연해, 광열 등 13분의

대강사를 위시하여 그 외 고승들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보물 제1347호인 사산대사 부도는 대흥사 입구에 자리한 부도전 내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석조부도로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 높이는 2.7m이다.
지대석은 8각인데 그 위의 하대석에는 8잎의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상대석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위로 향한 연꽃무늬 8잎이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동물상이 조각되었다. 탑신 전면에 ‘청허당’이라 새겨서 주인공이 서산대사임을 밝혀 놓았다. 옥개석은 목조건축 양식에서 보여지는 기왓골·겹처마 등이 표현되어 있다. 또 추녀마루 끝에는 귀꽃 대신에 용두(龍頭)가 표현되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상륜부는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고 높은 보주형(寶珠形)을 이루었는데, 표면에 가득 조각 장식을 하였다.
인근에 있는 서산대사 탑비가 조선 인조 25년(1647)에 건립된 점으로 보아, 이 부도 역시 이때를 전후해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화문

  

 

두륜산 대흥사 해탈문 

청사자를 타고있는 문수동자

 

흰 코끼리를 타고있는 보현동자

 

 

범종

 

 

 

 

  

 

 

천불전의 지붕과  건물의 맵시가 매우 경쾌하며 정면3칸 분합문전체가 아름다운 꽃창살이다. 내부에는 경주에서 실어온 옥돌 불상 천개가 빽빽 하다.

 

 

천불상은 7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

중앙에 위치한 삼본불은 목조불이지만 주위의 천불은 옥으로 만들어져있다

구전에 따르면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 스님이 처음 천불전을 짓고 경주(慶州)에서 생산된 옥석으로 조각을 하게 했다.10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완성한 천불을 3척의 배에 나눠 싣고 울산과 부산 앞 바다를 지나 대둔사(대흥사)로 향했다. 항해 도중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일본 장기현(長崎縣)에 밀려가니 일본인이 3백여개의 옥불(玉佛)을 만나 서둘러 절을 짓고 봉안(奉安)하려 했다. 그러나 이 불상들이 일본인의 꿈에 나타나 '조선국 해남 대둔사(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된다'고 깨우치니 결국 일본인들은 옥 불을 거두어 해남으로 보냈다.

일본을 거쳐서 온 불상들은 밑바닥에 '日'자가 새겨져 있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천불전에 안장된 옥불들은 신도들의 꿈에 나타나 다시 한번 기이함을 보였다. 경상도 지역 신도들의 꿈속에서 불상들이 '가사를 입혀달라'고 한 것이다. 결국 신도들은 가사를 만들어 입히고 4년마다 새 가사로 갈아 입히고 있다.갈아 입힌 다음 남은 가사는 모조리 신도들이 챙겨가는데 이 가사를 소지한 사람은 무병장수(無病長壽)하고 만사형통(萬事亨通)한다고 전해 온다.

 

 

 

시도유형문화재 제 93호

용화당은 불경을 배우는 학승들이 거거하는 선방 겸 강당 건물로 조선 순조 13년(1813)에 고쳐 지었다고 한다.

駕 虛 樓  허공을 올라탄다는 문턱

 

 

침계루(현판 이광사)

침계루를 지나  북원 안마당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대웅보전,그 좌우에 명부전과 범종각, 응진전이 나란히 있다. 응진전 앞3층석탑은 

이 절의 유물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3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각 (김정희 친필)

안에서는 강의를 듣는 불자들의 조용한 모습이 아침 시원한 공기와 하얀 문창살에 부딪히는 햇살과 더불어 무더운 여름의 청량제처럼 보인다.

 

 

대웅보전(조선후기 서화가인 이광사 친필)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날때 초의선사를 만나려고 이곳에 들렀다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을 보고 당장 떼어 내라고  하였다가

귀양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찾아와  걸으라고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층석탑 

 

 

 

 

 

 

 

노랑어리연 

 

 

 

 

 

 

   노랑어리연꽃


                        김종태



  잡지 못하는 욕망

  버리지도 못해

  마음이 어리니

  생각마다 부질없다


  달뜬 마음 허황한 꿈

  둥둥 떠 바람에 나부끼고

  내 영혼의 피를 빨아먹는

  사랑하는 사람아


  가련다 버리련다

  가래떡처럼 또 뱉고

  그 마음 또 몸으로 삼키니

  한오라기 탯줄이 아직도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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