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
금산사는 1400여년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 숨쉬는 수행도량이다.
조선 성종 23년(1492)에 작성된 "금산사 5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흔히 통일신라 시기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의하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남아있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에 의하여 금산사가 백제 법왕 1년인 599년에 창건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후 금산사의 모습이 크게 부각된 것은 통일신라 시기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한 중창 때문이다.
금산사에서 숭제법사의 가르침을 받아 수행을 하던 진표율사는 27세 때에 변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철저한 수행에 전념하였다. 17년 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의 고행을 통하여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본을 전해 받게 된다.
이후 진표율사는 금산사로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불사를 발원하고, 경덕왕과 왕실의 후원을 받아 6년에 걸쳐 가람을 대규모로 일으켜 세웠다. 이 때가 경덕왕 21년인 762년부터 혜공왕 2년인 766년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금산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금산사사적"의 내용을 근거로 불 때 599년 백제 법왕의 자복사찰로 창건되었으며, 이 후 진표율사에 의한 6년여의 중창으로 사찰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 자리 메김 한 것은 진표율사 때부터이다.
천왕문
금강문과 일직선상에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모신 전각이다.
외호신이란 불국정토의 외곽을 맡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며, 동, 서, 남, 북 네 곳을 지키게 된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8호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보제루
천왕문을 지나 가람의 중심에 이르면 누각 건물이 보제루이다. 앞�7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서 아래층은 절 앞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누각건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 시대에 와서의 일이다.
잦은 외침에 따라 승병이 조직되고 사찰이 의승군의 결집장소가 되면서 군사적 필요에 의해 누각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이후 승병이 사라지면서 누각건물은 법회와 강설, 그리고 대중집회의 장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리잡고 있다.
보제루는 정확한 연혁이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에 만세루(萬歲褸)라는 12칸짜리 누각이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를 계승한 건물이라 생각된다.
미륵전 : 국보 제62호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류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정유재란때 소실되었다. 지금의 모습은 인조 13년(1635)에 수문대사가 재건하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특이하게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러한 다층의 사찰 건축으로서 미륵전은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축적된 기술적, 미학적 아름다움은 국토 곳곳을 불국토의 장엄으로 만들어 나갔던것이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 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뎌해주고 있다. 한편 오른쪽 벽에는 1890년(고종 27)에 조성한 제석천룡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준(聳俊), 정선(定善), 오종(午從)
등의 금어(金魚)가 그렸는데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며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미륵불 본존은 높이가 11.82m이고 삼본불 중의 협시는 8.79m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었다. 그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 조성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대적광전과 육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
대적광전은 연화장세계의 주인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화엄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고 해서 비로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대적광전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조선시대 건물이었으나 1986년에 화재로 전소된 후 1994년에 본래대로 복원하였다. 원래 대웅광명전(大雄光明殿) 또는 대법당이라고도 불렀다.
육각다층석탑은 대적광전 오른쪽 앞마당에 위치하며 탑의 재질이 흑색의 점판음으로 된 특이한 경우인데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공예적 석탑이다. 본래의 자리는 봉천원구가 있던 대웅대광명전의 앞마당에 있었다. 봉천원구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33)에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했으므로 탑도 이 무렵에 조성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유재란으로 봉천원구가 모두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대사구 곧 지금의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탑을 옮겨왔다.
이 탑은 신라시대의 일반적 석탑에서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 공예탑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작품이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각 층의 체감비례가 적절하고 옥개석의 조각이 섬세한 점 등이 이후 고려시대의 공예탑이 지니는초기적 수법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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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련대(石蓮臺) 보물 제23호
불상의 대좌로서 정확한 이름은 석조연화대인데, 높이 1.67m, 둘레가 10.3m가 넘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의 연화대좌인데다가 더욱이 하나의 화강석으로 각 면에 조각한 수법이 정교하고 아름답다.
적멸보궁
방등계단 옆의 옛 나한전 자리에 세워진 예배각(禮拜閣)으로 유리벽을 통하여 방등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경배하며 예불을 드리는 곳이다
불전 내부에는 따로 불단을 차려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는 통도사 대웅전과 같은 경우이다.
방등계단과 석종형 부도(보물 제26호)
송대(松臺)라고 부르는 미륵전의 북쪽 높은 대지에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있다. 또한 이 계단의 중앙에 보물 제26호인 부도가 1기 있어 그 형태에 따라 석종형(石鐘形) 부도라고 부른다.
방등계단의 수계법회(受戒法會)를 거행할 때 수계단을 중앙에 마련하고, 그 주위에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데 사용했던 일종의 의식법회 장소이다.
이러한 예는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 와 개성의 불일사(佛日寺) 등지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국 불교의 독특한 유산이다.
오층석탑 보물 제25호
미륵전의 북쪽 위 송대에 자리한다. 정사각형 판재를 이용한 이 석탑은 높이가 7.2m로서 소박하고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본래 기록에 따르면 9층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옥개석의 형태나 체감율 등에서 6층 이상이 손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11월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모악산금산사오층석탑중창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979년(경종4)에 시작하여 981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 보인다. 한편 탑 속에서는 중창기와 함께 금동관음상을 비롯한 여러 소불상이 발견되었느� 이 탑의 복장품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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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
소승불교의 최고의 경지에 오른 나한에 대한 신앙을 하는 전각이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서 의역하여 살적(殺賊), 응공(應供), 응진(應眞)이라 한다.
살적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받아 죽였다는 뜻이며, 응공은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을 만하다는 뜻이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보통 5백인을 모신 오백나 한전과 16나상을 모신 응진전으로 대별된다.
노주(露柱) 보물 제22호
노주란 ‘노반지주(露盤之柱)’의 줄임말로서 처음에는 전각의 정면 귀퉁이에 세우는 두 개의 장대였다가 나중에 탑의 상륜부를 구성하는 부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탑의 일부인 이 노주가 왜 별도의 조성물로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사중기록에 보면 ‘노주’는 잘못 된 명칭이고, ‘광명대(光明臺)’로서 미륵전 앞에서 미륵불에게 광명을 공양하던 석등이었다고 한다.
이 말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없어진 상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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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전 (보물 제827호)과 석등(보물 제828호)
대장전은 본래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하면서 세워졌다. 미륵전을 짓고 이를 장엄하는 정중목탑(庭中木塔)으로서 가운데에서 우측부분에 위치하였으며 정팔각원당형으로 조성했던 건물이다. 당시의 양식은 탑과 같이 산개형(傘蓋形)의 층옥(層屋)으로서 맨 꼭대기 옥개에는 솥뚜껑 모양의 철개(鐵蓋)를 덮고, 다시 그 위에 불꽃 모양의 석조 보주(寶珠)를 올렸다.
고려시대의 팔각석등은 대장전 앞에 지대석에서 보주까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3.9m이다.
사각형의 지대석위에 하대석을 얹고 그 위에 간주석(竿柱石), 연화석(蓮華石), 화사석(火舍石), 옥개석, 보개, 보주의 순서로 조성되었다.
범종각
보제루 올라가 가람 중심의 서편에 있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볼때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다.
이렇게 범종각이 오른 쪽에 위치하는 이유는 불교의 체용설(體用說)에 입각하여 볼 때 오른쪽은 체(體) 왼쪽은 용(用)에 해당하는데, 소리는 곧 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종각에는 불전 사물인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을 함께 비치하고 있다
금강문
일주문을 지나 100m쯤 오르면 작은 개울 건너에 자리 잡은 금강문을 보게 된다. 금강문은 대개 천왕문의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거나 때로는 천왕문 안에 조각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금산사와 같이 금강문을 천왕문 앞에 별도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대체로 불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의 역할을 담당하며 인왕역사라고도 한다.
이 신은 여래의 온갖 비밀스런 사적(事跡)을 알고 있을뿐만 아니라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현겁 천불(天佛)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구름 기운 아물아물, 골 안은 널찍한데,
엉킨 수풀이 깔린 돌에는 여울소리 들려오네.
중천에 별들은 금찰(金刹, 금산사)을 밝히는데,
밤중에 바람과 우레가 석단(石壇, 방등계단)을 감싸 도는구나.
낡은 짐대「幢」엔 이끼 끼어 글자가 희미한데,
마른 나무에 바람 스치니 저녁 추위가 생기누나.
초제(招提, 객실)에서 하룻밤 자고 가니,
연기 속 먼 종소리에 여운이 한가롭지 않다.
- 조선조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절을 찾아 방등계단에서 남긴 시-
*설명은 금산사 홈페이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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