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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정족산222.5m (강화)과 전등사

by 아 짐 2020. 12. 30.

일 시 : 2020. 12. 29

참 가 : 아찌랑 나랑, 친구 혜숙이랑

코 스 : 전등사매표소- 전등사- 정족사고- 남문- 정족산정상- 서문- 남문- 매표소

 

날씨도 추워지고 코로나19는 극성을 부리고 집밖을 나서기가 주춤해지는 요즈음이다.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는 근무는 하면서 집밖을 나서기가 두렵다는것도 모순이다. 나하나쯤이야 이런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광지로 몰려다니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데 나도 거기 한몫 거든다고 생각하니 뒤꼭지가 땡기기는 하지만 강화 순무김치도 생각나고 못가본 전등사를 떠올리며 산행지 검색하니 전등사 정족산이 연결되어 있어 산행지로 선택했다.  오랜만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 강화 갈건데 갈래? 하니 OK

 

친구들 모임을 못한지 벌써 반년이 넘어가고.. 이렇게나마 친구 얼굴을 보며 정족산 산행에 동행한다.

입장료 3천원, 주차비 2천원.  친구는 불자 증명서 내고 통과, 아찌는 경로우대로 통과.  나만 입장료 징수 ㅎ

 

매표소가 아래에 있는데 이건 구 매표소인듯..

 

강화 삼랑성(남문 방면)  사적 제130호

강화 삼랑성은 일면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성안에는 삼국 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시대에는 임시로 지은 궁궐인 가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이곳은 조선 고종3년1866에 프랑스 군대가 침공한 병인양요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 유명하며 동문안에는 이를 기념하기 이하여 세운 양헌수승전비가 있다.

삼랑성은 강화산성과 더불어 고려, 조선시대에 수도 개경과 한양의 외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강화 삼랑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병인양요: 고종3년인 1866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침범한 사건

 

이곳은 키큰 소나무와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는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어마어마한 나무들이 많다.

 

법당이자 문화공간인 무설전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서운겔러리라 한다.

 

우리나라의 최고 오래된 사찰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이다

전등사는 여느 절에서나 볼수 있는 일주문이 없고 이곳 종해루가 일주문 역활을 한다고..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 네이버 백과 펌-

보물 178호인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집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정치(華麗精緻)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향로전은 대웅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노전스님이 지내시는 곳이다.  불공용 제물의 저장고였으며 병인양요때 에는 중군의 거처였다고 전한다.

전등사 청동수조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6호

청동으로 제작된 이 수조는 안에 물을 채워 불이 날 경우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건물 주변에 배치되었다.  궁궐에서는 드무라 부르며 공중에 떠다니는 화마나 불귀신이 물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다른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해 설치했다고도 전해진다.

향로전 앞에 있는 이 수조의 크기는 지름 112cm, 높이 72cm이고 정확한 제작 연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발 형태로 된 수조의 입구 부분에는 덧띠가 둘러져 있고 안쪽에는 물고기와 자라가 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법고와 종각루

 

산행은 정족사고 뒷편에서 시작한다.

 

약수물 시원하게 한 잔 받아 마시고..

 

전등사 철종  보물 제393호

전등사 철종은 중국 송나라 때 회주 송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 종이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지금의 인천광역시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겼다.  종의 꼭대기에는 용 두 마리로 만든 종 고리가 있다.  종의 몸통 윗부분에는 팔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정사각형 여덟 개를 새겼다.  이 정사각형 안에는 중국 하남성 백암산 송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극락전

 

강화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 제186호

강화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은 전등사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보살 삼존상을 비롯한 총 31구의 불상을 말한다.  지장보살은 저승 세계인 명부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원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보살이며 시왕은 저승 세계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10명의 왕이다.

이 불상은 조선 인조1년(1636)에 수연을 포함한 12명의 승려 조각가와 신도 4명이 함께 제작하였다고 지장보살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기록되어 있다.

불단 가운데에는 전체적인 비례와 조형미가 뛰어난 민머리의 지장보살이 앉아 있다.  지장보살을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 준다는 귀신의 왕인 무독귀왕이 서 있고 왼쪽에는 사후 세계를 경험하고 이승에 돌아와 자신이 본 바를 세상에 알렸자는 도명존자가 젊은 승려의 모습으로 서 있다.  양쪽 시왕상 옆으로는 시왕의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상, 귀왕상, 녹사상, 동자상, 불교의 수호신인 인왕상 등 여러 권속들이 대칭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2010년과 2011년에는 지장보살 좌상과 시왕상에서 불교 경전과 복장 발원문, 후령통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었다.

강화 전등사 목조 지장보살 삼존상과 시왕상 등은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수연의 석가여래 삼불좌상(보물 제1785호)보다 10여 년 늦게 제작된 불상으로 수연 작품의 완숙된 조형미를 엿볼 수 있다.  또한 17세기 전반의 불상과 승려 조각가의 유파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후령통: 불상 안에 복장 유물을 담는 통

 

강화 전등사 약사전    보물 제179호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 주는 약사여래를 모시는 법당이다.  강화 전등사 약사전에는 석불좌상, 후불도, 현왕도가 있으며 모두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전등사 약사전이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광해 13년1621에 고쳐 지은 대웅전과 건축 양식이 유사하여 서로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지붕의 처마 무게를 받치는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뿐만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짜여 있는 다포 양식 건물이다.  천장의 바깥쪽은 꽃과 물고기 조각으로 꾸몄으며 안쪽은 우물 정자 모양으로 한 다음 연꽃과 덩굴무늬를그려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 현왕탱(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3호)

현왕탱은 사람이 죽은 지 3일이 된 망자를 심판하는 현왕과 권속을 그린 불화이다.  전등사 약사전 현왕탱은 약사전 불단 왼쪽에 자리한 영단(영혼의 위폐를 두는 단)에 걸려 있다.  화면 하단에는 고종21년에 승려 화가인 진철과 긍법이 그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원띠지가 알록달록하게 매달려있는데 불자인 친구도 돈을 꼬아 매달고 소원을 빌었다는 ㅎ

지폐가 많이 매달려 있다. ㅋ

 

삼성각을 마지막으로 전등사 구경을 마치고 사고지 방향으로 진행.

 

어디를 사진 명소라고 하는건지..

 

강화 정족산 사고지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7호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인 장사각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선원보각이 있던 곳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보관하였다.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옮겼다 다시 마니산사고를 거쳐 현종1년1660 이곳으로 옮기고 오른편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이 사고의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후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록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서울로 옮겨졌고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1998년 두 건물을 복원 후 옛 현판 장사각과  선원보각을 다시 달았다.

 

전등사 사찰구경과 정족산 사고지 구경을 마치고 이제 본격 산행을 시작한다.

 

어느산이나 오름은 빡시고 ㅎ

 

암문을 나가 보았는데 밖으로는 성곽길이 없어 다시 들어와서 진행

 

삼랑성 정상 방향 진행. 능선으로 올라오니 공기가 차가워 모자 꺼내 쓰고 귀도 덮고 ㅋ

 

성곽길 따라서..

 

중간지점 우측에서 올라 왔다.

 

강화는 올때마다 날씨가 이모양이다.  비가 안온게 다행이지 ㅠ

 

정상석은 없고 이정목이 대신한다.

 

우측 성벽 회전구간 아랫쪽에는 서문이 있고..

 

우물터인가 했더니 배수구다.

 

나뭇사이로 서문이 보인다.

 

아치형 서문

 

선두리 방향으로..

 

정족산 하산 후 오를 길상산 들머리인 로얄유스호스텔이 보인다. 길을 잘 찾아 내려가야하는데 하산로를 못찾아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 강한 바닷바람에도 굳건한 모습이여 ~

 

유스호스텔로 내려가는 길을 못찾아 결국 남문으로 오고 말았다.  할수없이 매표소로 다시 나가 도로를 따라 로얄유스호스텔을 찾아 간다.

매표소 아래 주차장 건너 소나무숲 아래 쉼터에서 커피와 빵, 과일로 요기를 하고 2차 산행지로 이동